▲ 강병로

사회부장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맞은 첫 주말. 아들 녀석과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코 밑이 거뭇거뭇해지면서 제 엄마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지만 제법 의젓한 구석도 있다. 술 마신 아빠의 이야기 상대가 돼 주기도 하고, 아주 이따금씩은 그런 아빠와 함께 잠을 잔다. ‘술 마신 아빠는 내 몫’이라고 말 할 줄 아는 녀석. 게임과 축구에 미쳐(?) 어느 하룬들 편할 날이 없지만 그래도 제 역할은 하는 놈이다. 마흔 아홉인 아빠와 말이 통하는 열 두 살짜리 아들.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로 뭐가 좋겠느냐고 묻는 녀석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제 누나다. 냉정하게 말해 아들 녀석은 두 살 위인 제 누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아들도 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고치려 들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보다 못한 딸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에게 엄청난(?) 면박을 줬다. “너는 미래가 두렵지도 않니?”. 이게 무슨 말? 아들보다 내가 더 깜짝 놀랐다. 열넷 딸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미래’였다. 그리고 ‘두려움’. 자기 눈에도 게임과 축구 외에는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 동생이 철없고 한심해 보였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앞서가는 말 아닌가. 딸 녀석 스스로도 맘껏 놀고, 여유 있게 공부하고 싶다고 툴툴대지 않았는가. 그런 딸아이가 동생에게 쏟아낸 말은 나도 제 엄마도 함부로 내뱉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그 말이 열 네 살짜리 딸아이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했다. 착잡했다. 자신의 미래가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딸아이는 알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가 사는 세상이 치열한 경쟁사회이고, 그 경쟁에서 버티지 못하면 순식간에 낙오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물론 우리 가족도 선거 홍보물을 펼쳐놓고 논쟁을 벌였다. 아내와 내 생각이 다르고 딸과 아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5년의 삶을 이야기 했다. 아이의 생각이 다치지 않도록 후보자에 대한 인신공격은 삼갔다. TV토론을 보면서 스스로 느꼈을 테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선거가 끝났고, 우리 가족은 또 5년의 삶을 준비한다.

아들과 함께 간 목욕탕. 그 안에서 앞으로 5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야기했다. 우선 시간적인 변화. 아들은 5년 동안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한다. 헌법이 바뀌지 않으면 고교1년 겨울에 새로운 대통령을 보게 된다. 물론 이 때도 아들에게는 투표권이 없다. 이 시기에 아들은 두 번의 우화과정을 거칠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다. 생각도 변할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그 세월 동안 내 어깨는 무거워질까. 가벼워질까. 지난 10여 년,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경험을 했다. 10년 세월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무척 힘겨웠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노부모를 10년 넘게 모신다는 건 쉽지 않았다. 병원비가 어깨를 짓눌렀고, 아이들이 자랐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맏딸인 아내는 자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고, 아이들도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할 것이다. 비전을 갖기엔 너무 열악한 지방도시, 강원도에서의 삶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이 속에서 우리는 또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런 우울한 생각을 헤집고 아들 녀석이 불쑥 내뱉는다. “아빠! 냄비라면 먹자. 먹어야 살지.” 아들에게 또 한방 먹었다. 아들 녀석에게는 미래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먹어야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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