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전설 속에서 수해의 흔적을 찾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이름하여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이 그것이다. 1936년에 있었던 일로 이보다 앞서 1925년에 발생한 '을축년(乙丑年) 포락'과는 별개의 것으로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 일대가 물바다로 아수라장이 된 사건이다. 얼마나 심했는지 영동 사람들 디엔에이 속에 물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면 아마도 이 사건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병자년 포락 얘기가 들어 있는 설화 몇 편을 채록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저기 남대천 물가에 가면 강릉교가 있사. 그 옆 철교 위에 크다마한 바우가 두 개 서 있는데, 그기 옛날에 강릉 김씨들이 거기다가 월하정을 지었단 말이야. 월하정을 지었는데, 어느 해 수해에 그기 무너져 뿌리고 빈 터만 남았사." 이렇게 시작되는 전설은 신라 화랑 무월랑과 연화봉 아래 살던 강릉 처녀 연화 아가씨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느 해 수해'가 바로 병자년 포락이다. 즉 이 설화는 병자년 포락에 연화 아가씨의 사랑 전설로 유명한 남대천변 월하정이 유실됐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 하나. "옛날 허균 생가 그 터이 좋다 하는데 초당 하면 그 집터에 제일 부자가 살았어요. 그런데 병자년에 포락이 나서 경포 오죽헌 이 밑이 다 평미리가 됐어요. 물이 내려와 가지고 말이지. 여기 물이 엄청 찼단 말이지. 집에는 가마솥이고 뭐고 물에 둥둥 떠돌아 댕기고 초당 동네가 그랬사." 이건 초당동의 풍수 설화 중 앞 머리로 역시 병자년 포락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게하는 대목이다. 병자년 포락으로 예컨대 소금강천이나 학산천 등 영동지역 하천들이 지금과 같은 물길로 바뀌게 된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한 300mm쯤 왔을 거라 추측되지만 관개 수리 기술이나 제방의 수준으로 보아 그 정도로도 포락 형국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아, 임오년(壬午年) 포락은 어찌 이리도 심한가? 무려 900mm나 쏟아지다니. 다시 한 반백 년쯤 뒤에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지 모른다. "옛날 강릉 남쪽 모산봉 옆에 장현저수지가 있었사. 일제시대 강릉군 성덕면 아낙들이 구름처럼 모여 두 해 동안 모래 하고 흘기로 쌓은 그기 사력질 저수지인데, 반백 년이 한참 지난 그날 임오년 포락에 마침 물가 송파정에서 사랑하던 두 남녀가 내려 오다가 쓸려내려가고…." 이런 전설이 말해질지 누가 알겠나. 신화니 절설이니 민담이니 하는 설화들이란 본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어니.
 장현동저수지의 송파정은 남았지만 병자년 포락 때의 월하정처럼 경포의 활래정이 잠기고 방해정이 파손됐으며, 제일강산 경포대도 아찔아찔 하고. 영동지역 문화재 열두 곳이 심한 피해를 입어 인간사 부질없음에 절망하게 된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친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지금이 문화재 얘기를 할 때인가. 아들 딸 부모를 잃고 통곡하는 사람들, 집과 논밭을 유실한 사람들이 넋을 놓고 있는데, 상품들이 쓰레기로 버려져 상인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당장 먹을 물이 없어 정신이 혼미해지고 드디어 미쳐 가려는 판인데 무슨 설화 타령인가.
 사람들은 또 얘기한다. 저 대관령 국사성황님이 드디어 노하셨다고. 백두대간의 혈맥을 끊는 굴을 그렇게 여러 개 뚫어 놓고서야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느냐고. 집중 폭우의 천재와 난개발의 인재가 영동지방에서 온전히 이렇게 그 참혹한 실상을 드러냈다고. 수해 입지 않은 것이 미안해 해 쪼이는 날 내 편하자고 양산 펴고 길 나서지도 못하겠다고. 그런데 무슨 설화니 문화재니 떠드느냐고. 아, 원통할진저 임오년 포락이여.
 그러나 전설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다. "옛날 임오년에 영동지방에 포락이 있었사. 사람과 집이 떠내려가 버렸지. 하지만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고 서로 돕고 삽질을 다시 시작해 더 잘살게 됐는데…."
李光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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