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열

영동본부 취재국장

“괜찮겠지, 별 일 있겠나”하는 무감각 안전불감증이 또 대형 참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희생의 대상이 고교 2학년 꽃다운 청춘들이었다. 수학여행을 간다고 들뜬 마음으로 재잘거리며 배에 올랐을 그들.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침몰한 ‘세월호’ 선체에서 안타까운 주검들이 잇따라 인양되고, 슬픈 스토리가 전해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울컥 눈물이 흐른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나갈게’라며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양보하고 숨진 비정규직 여 승무원의 희생,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다시 배안으로 들어갔다가 숨진 여학생, 목이 터져라 제자들을 탈출시키려다 함께 하늘나라로 떠난 20대 선생님, 싸늘한 시신과 함께 건져올려진 사연 하나하나에 온 국민이 가슴을 치고, 아직도 배 안에 남아있을 실종자들을 위해 눈물의 ‘노란 리본’을 줄지어 걸었다.

여객선 속에서 스러진 아들, 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그 꿈 많은 미래가 무참히 잠기는데도 대한민국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선장과 선박직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위험을 뒤로 하고, 배에서 먼저 탈출했다. 그들이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배 안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실종자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못해 줘 정말 미안하다”는 장탄식뿐이었다. 우리가 이미 그 존재를 모르지 않았던 안전불감증, 관행적 부실 안전관리 시스템이 빚어낸 참극이기에 이 슬픔이 더욱 아프고 괴롭다.

해운사들의 안전운항을 지도·감독하고, 선박의 안전검사를 담당하는 기관·단체의 수장이 대부분 감독관청인 정부 부처의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는 점도 씁쓸하기 이를데없다. 어떤 전문가는 “관리·감독에서 ‘창’ 역할을 해야할 정부 담당자들이 자기 부처 출신 선배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고, 또 본인도 나중에 가게 될 단체나 기관에 대해 날선 창을 휘두를지, 무딘 창을 쓸지는 능히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바다는 견제나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오직 ‘그들만의 영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과연 바다만 그럴까. 정부 부처 산하기관에 수많은 낙하산 전직 관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형 사고나 문제가 터지면 단골 처럼 지적돼 왔으나,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가 잊고 있던 일일 뿐이다.

그런 구조적 망각의 한계속에서 여객선이 개조되고, 턱없이 많은 화물을 싣고, 구명장비가 작동을 안하는 치명적 허점이 잉태된 것이다.

우리가 무심했던 것이 어디 그 뿐일까? 위험시설 이용시 대피 훈련이나 구명장비 작동 요령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아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집단 주거지 주변의 산을 파헤치고, 구명조끼도 착용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바다로 들어가도록 하고, 건물에서 철근을 빼내고, 음주 상태에서 버스 운전대를 잡고, 봄철 건조기에 달리는 차 안에서 불붙은 담배 꽁초를 던지는 등등의 비정상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이쯤되면 “나만 아니면 돼”하는 ‘복불복’이나 ‘룰렛’의 위험을 안고 생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괜찮을거야”, “전에도 그랬는데” 하는 아슬아슬 복불복의 위험으로 인해 우리는 이번에 미래를 잃고, 신뢰를 잃고, 감당못할 아픔만 인양하는 큰 대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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