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백운

석왕사 주지

붓다 당시 코사라 국왕 파세나디와 그 왕비 맛리카는 어느 날 다락에 올라 조망을 즐기다가 약간 심각한 문제로 화제가 옮아갔습니다.

“맛리카여, 당신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있소?” 한참을 생각하던 왕비는 이윽고 대답하였습니다. “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왕도 그에 동조하였습니다.“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의견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거니와 그들은 그 결과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 붓다가 자기들에게 가르치신 내용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파세나디왕은 곧 마차를 타고 붓다를 찾아갔습니다. 왕으로부터 고백을 듣고 난 붓다는 깊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용구가 든 계를 설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자기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소중하다고 아는 사람은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

붓다는 인간의 에고이즘을 그대로 긍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시 한걸음 나아가 생각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있어 소중하듯 남에게 있어서도 자기는 소중하다고.

무아를 내세워 붓다는 인간성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인간과 인간성을 깊이 이해했으며, 그런 이해 위에서 무아설도 주장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목숨을 해치지 말라는 그의 권고도 이것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비록 동물이나 곤충이라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처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담마파다’는 270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온갖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면 그 까닭으로 하여 고귀한 자는 못된다. 온갖 생명 있는 것을 해치지 않는다면 고귀한 자라고 불린다.”

불교에서는 ‘중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요. 물론 이 말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수도 있으나 원칙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다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살생하지 말라는 규정도 인간의 범위를 넘어 동물·곤충에까지 이릅니다. 이는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남에게 있어서도 그러리라 함을 승인하는 행위인 동시에 생명의 고귀함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명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자비의 덕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비는 인간·동물을 구분하지 않는 철저한 사랑이며, 어떤 악인이라도 제외하지 않는 애정입니다. ‘자경’에는 이런 말씀이 보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려 하는 것 같이 일체의 생명체의 끝없는 자애의 념을 일으켜야 한다. 또 일체의 세계에 대해 끝없는 자애심을 일으켜야 한다. 위로나 아래로나 그리고 옆으로나 방해하는 것이 없고 원망함이 없고 적대함이 없는 끝없는 자애심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에 대한 애착에 대해 한번 입장을 전환해야 합니다. 남의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모습을 바꾸어 온 생명체에 대한 자비로 지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매우 고상한 이상을 표방하면서도 그것이 풍부한 인간 이해에 입각하고 있음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