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원

원불교 강원교구 교무

88올림픽을 치르며 이제 우리나라도 세계와 어깨를 겨룬다고 자부심을 갖던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시절이 있었다. 88올림픽 시절에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얇은 수첩처럼 생긴 물건 하나가 왔다.

세계의 모든 정보를 원하는 대로 실시간 접할 수 있고, TV와 영상도 볼 수 있다. 어설픈 필름카메라와 캠코더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화질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할 수도 있다. 카세트테이프 몇 상자 분량의 음악을 넣었다 뺄 수 있으며 테이프하고는 달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어도 음질 변화도 없다. 책상 전체를 차지하는 컴퓨터는 MS-DOS 프로그램을 다룰 수 없으면 사용조차 할 수 없는데, 이 수첩은 움직이는 그림처럼 직관적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고, 성능과 기능은 컴퓨터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필요한 기능이 있으면 기계를 따로 살 필요 없이 언제든지 마켓에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

출장 관계로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 중일 때도 업무를 보며 결제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수첩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며, 이 전화기는 놀랍게도 전 세계인들과 통화료 부담 없이 전화와 메시지가 가능하다.

이것이 88올림픽 시대에 사는 눈으로 본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의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의 물건이라 할 만하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박중빈, 1891.3.27∼1943.6.1)는 100년 전 물질문명이 개벽되는 대변혁의 시대를 예견하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물질문명의 개벽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삶의 질은 물질개벽의 상징과 같은 스마트폰처럼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는가. 스마트폰이 등장하였다고 하여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졌다고 하는 기사나 정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스마트폰으로 인해 교육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는가.

우리는 물질문명 첨단의 끝을 달리고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등장하였어도 그다지 행복해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나는 더 나은 물질문명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행복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분명 더 나은 삶을 위해 물질문명의 개벽시대를 열었지만 실제 우리 삶이 그리 행복해지진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고 치유받고자 하는 바람이 ‘힐링’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렸다.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원한다.



이제는 물질문명의 ‘일시적 만족’이 주는 행복은 불영속적이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물질문명의 개벽시대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 화두는 모두에게 공통적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물질문명이 주는 조건에서 다른 관점으로 전환하는 생각의 발상이 필요함을 전제하고 있다.

진짜 행복을 위해 물질문명에 지배되어 있던 나의 생각을 전환해 보자. 물질개벽시대는 ‘물질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노라’ 하며 우리 모두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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