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영승

도의원

새해를 맞으면서, 설을 쇠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나눴다. 그런데 그 복은 누구로부터 받을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필자는 복은 나 자신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내가 성실하고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좋게 평할 것이다. 그 좋은 평판이 쌓이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이 하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는 경전의 말씀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저 나 혼자만 열심히 살면 복을 받을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국가의 공적문제, 공익에는 무관심한 채 나만의 이익을 위해 성실히 살면 복이 올까? 물론 남을 해치지 않고 열심히 살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삶이고 복을 받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복은 차원이 좀 다르다.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살면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이익들을 조정할 것이라는 게 자본주의 시장(市場)의 관점이다. 그러나 삶은 인간(人間)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듯 본질적으로 남과 무관할 수가 없고, 시장은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어서 제도적 배려로 보완돼야 한다.

40년 전 세계인구의 상위 5%의 소득은 하위 5%의 30배, 15년 전에는 60배, 2002년에는 114배로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 부의 90%가 세계인구 1%에 속해있으며, 30억 명이 하루 20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의 정신병발생률은 낮은 나라보다 3배 높고 사망률은 높아지고 기대수명은 떨어진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빈곤은 가족과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빈곤층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황무지로 표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법적·제도적 보호로부터 제외되기 십상이다.

선출직들은 힘센 부유층의 목소리를 주로 경청한다. 빈곤층은 정책결정권에서 소외된 주변인이다. 빈부차가 커지면 사회안정성이 무너진다.

사회가 불안정해질수록 부가 주는 안정감에 집착한다. 부가 인생의 목적이 되고, 큰 집과 큰 차, 좋은 옷 등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천박한 삶의 기준은 사유능력을 앗아가고 말초적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부자를 만나면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삿된 풍조가 생긴다.

현대의 많은 부자들은 선대의 부를 물려받았다. 우연과 운이지 능력이 아니다. 지구는 기와 에너지로 연결돼있고, 현대인의 삶은 서로 뗄 수 없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수렵채취시대에도 없었다.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상호의존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타인의 빈곤과 불행에 대한 무관심은 나의 삶에 치명적 위해가 될 것이다. 빈곤은 이제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 세계경제가 엉망인데 우리나라 경제만 잘 될 수 없고, 나라경제가 위축되는 데 강원도만 잘 살 수 없고, 강원도 경제가 안 돌아가는 데 내 지역만 잘 돌아갈 수는 없다. 경제는 물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연대감, 공동책임감,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나의 삶의 보루인 시대에 살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살펴야 한다.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 어떤 내용의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 모두가 잘 감시해야 한다. 그들의 결정이 나의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익이 충돌할 때는 윤리적·공익적 판단이 중심이 돼야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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