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 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비가 내렸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던 16일 짧은 생을 다한 흰 목련과 연분홍 벗꽃 위로 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는 손에 손에 흰 국화를 들고 1년전 홀연히 떠나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직 팽목항 앞바다에 잠들어 있는 단원고 허다윤 양 또래의 중·고생들, 일과를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해 나온 직장인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선 어린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손녀를 두고 있을 초로의 어르신들…. 추모객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밤 늦도록 이어졌고 조화를 부여잡은 국민들은 깊은 회한을 토해냈다.

다른 모습도 있었다. 1년전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한없이 무능했고, 무책임 했던 위정자들은 진도와 안산에서 헌화와 분향을 거부 당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참사의 책임을 져야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팽목항에서 위문을 거부하며 분향소 문을 걸고 떠나버린 유가족들 대신 검정색 넥타이가 어색한 참모들과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대국민 발표문을 황망히 읽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서 예정됐던 추모식도 선체 인양과 특별법 시행령 철회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이 대정부 항의표시로 취소하면서 세월호 희생자 애도대열에서 배제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직면했다. 국정 2인자인 이완구 국무총리 등을 둘러싼 금품제공 의혹이 몰고온 총체적인 국정위기를 감안해도 상상할 수 없는 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국정은 끊임없는 돌발변수의 처리라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1년전에 예고됐던 세월호 참사 1주기라는 국민적 추념일에 대한 정부의 준비는 위기대응에 무능했던 1년전 정부와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만기 친람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박 대통령은 논외로 한다해도 이병기 비서실장 이하 참모들의 역할과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이 되고 있는 중남미 4개국 순방 출국일이 “왜? 하필 16일이냐.”는 질문을 5000만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에 던지고 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말하는 ‘도피성 해외 출장’이라는 주장은 믿고 싶지 않다. 또 진보청년들이 뿌린 전단에서 비판한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도덕적, 정치적 파산을 선고합니다. 남미 순방 안녕히 가세요.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야유도 물론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왜, 하필 16일이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청와대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은 “대외적으로 약속한 국가적 사업으로, 순방을 연기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정택 정책조정수석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역시 같은 논리를 고수했다. 참모는 지도자 보다 한 발 먼저, 한 뼘 넓게, 한 치 깊게 보라는 충언이 있다. 또 ‘노(No)!’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조언도 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언이 있다. 세월호 희생자를 잊지 못하고, 그들을 여전히 보내주지 못하는 유가족들과 국민들을 청와대 참모들이 한 치 깊게, 한 뼘 넓게, 한 발 먼저 살펴봤다면 머나먼 이국으로 세일즈 외교를 떠나는 대통령에게 ‘도피성 출국’이라는 비난과 야유는 쏟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임진년 4월30일 새벽,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가운데 왜병에 쫓겨 허겁지겁 백성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던 임금을 상상하는 국민들도 없었을 것이다. 민심 보다 보스의 심기를 먼저 살피고, 자리와 권력을 탐하는 참모들이 있는 한 무능과 무책임 한 국정은 악순환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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