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연수
  소설가·시인·수필가

드라마 ‘징비록(徵毖錄)’에서 왜군의 진격에 공포에 질려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하려는 선조를 한사코 말리면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울부짖는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로!” 그런 서애를 뿌리치고 한양을 빠져나가면서 선조는 유성룡에게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제수한다. 말이 좋아 대장이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왕이 없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다가 뭇 백성들과 함께 죽으라는 복수에 사로잡힌 잔인한 인사 조치이다. 서애는 이미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도제찰사’였다.

임금의 시호에는 ‘태조(太祖)’와 ‘세종(世宗)’, ‘연산군(燕山君)’처럼 조(祖), 종(宗), 군(君)을 붙인다. 나라를 세웠거나 큰 위기에서 구한 왕들에게는 태조처럼 조(祖)를 붙여주고, 덕치를 베푼 왕에게는 종(宗)을 붙인다. 노산군(단종), 연산군, 광해군처럼 신하들의 소위 ‘쿠데타’에 의하여 자리에서 물러난 왕은 ‘군(君)’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 하늘이 내린 성군인 세종도 차마 조(祖)를 붙이지 않았거늘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왕들을 선조, 인조라고 사록은 기록한다.

어찌된 일인가? 선조는 자신이 후궁의 출신임을 늘 의식하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의심하였다. 자기의 아들인 광해군과 그 어떤 신하들도 믿지 않고 저울질 하였다. 선조는 나름대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근검절약하여 명필로 소문난 왕재였다. 그러나 권력앞에서는 몰염치한 군주였고, 전쟁 앞에서는 공포에 질린 비겁자에 불과하였다. 절대 파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하더니 얼굴을 바꾸어 한양을 버리고, 개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위주까지 도피한다. 끝내는 ‘자신의 나라 조선’을 버리고 ‘상국땅 명나라’로 도피할 생각을 한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에게 끝까지 힘을 실어 주지 않자, 명나라와 조선조정의 신하들도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결국 시들어 가는 명나라와 욱일승천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외교로 국익을 챙기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옥좌에서 굴러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판단착오로 40년도 지나지 않아 피 내음이 채 가시지못한 조선땅은 또다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연이은 참극을 당한다. 청태종 앞에서 무릎꿇고 항복을 하니 영원한 신하의 나라가 된다. 잔인한 청나라의 압제아래 신음하다가 1910년 결국 일본에게 36년간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다. 1945년 겨우 나라를 되찾았으나 1950년엔 또 다시 우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싸움터가 된다. 동족간에 몰려 총부리를 맞대니 6.25동란이라는 더 큰 비극으로 재현된다. 아름다운 국토의 허리는 동강나고 한 핏줄인 남과 북이 적대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 시대, 한 무리 리더들의 잘못이 화를 눈덩이처럼 몰고 오는 것이 역사이다. 두고두고 , 너나없이 징비(懲毖)해야 할 이유이다.

‘전(戰)’과 ‘란(亂)’은 의미와 크기가 다르다 1·2차 ‘세계대전’처럼 외국과의 싸움은 ‘전(戰)’이고 동학란, 6,25동란같은 민족내의 다툼은 ‘란(亂)’이다. 우리는 지금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라고 한다. 바다건너 일본도, 만주의 여진족도 역사 속에서 같은 겨레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통하지 않는 역사의 정서적 연대감, 무사 안일을 바라는 요행, 중국을 믿는 사대 속에서 전쟁의 참화를 예방 할 골든타임을 매번 잃어버린 조정이었다. 그런 리더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치열한 기록으로서 ‘징비록’과 ‘난중일기’가 태어난다. 실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붓을 쥔 장군 유성룡 정승과 칼을 쥔 선비 이순신 장군의 절체절명의 한숨과 뜨거운 사랑의 기록인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우리 모두 가슴으로 받아 아로 새겨야 한다. 그리고 모처럼 드라마, 영화로 일어난 국민적 공감대를 ‘축복’으로 승화시켜 국난과 지구의 난을 대비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선진화, 세계화된 나라로 발전해 나가야 할 민족적 책무를 ‘대한민국 조정과 백성들’은 이제는 결단코 징비하여야 한다. 지금, 아니면 우리에게 기회는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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