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창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우리 민족은 일제 36년 압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5년 만에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으로 전국토가 포화에 휩싸여 폐허가 되었고 국민의 삶은 한 끼의 때(식사)를 걱정할 정도로 곤궁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2번째로 가난한 나라로서 국가와 민족이 미래와 희망이 없는 절박함이 현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 차관을 빌리려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 손을 내밀었지만 선진국은 냉담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자원이나 신용도 없는 나라에 뭘 믿고 돈을 빌려주겠나. 암울하였던 생각 끝에 1963년 독일에 광부를 보내고 천신만고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1964년 10월 3750만 달러 차관을 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참으로 암담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회가 왔다. 월남 정부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월남 파병 요청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파병결정을 못하고 고심하던 중 미국 본토에서는 미국 국민들의 반전 여론으로 더 이상 전투부대 파병이 어려워지자 우리나라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 2개 사단을 월남으로 보내는 것을 검토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만약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2개 사단이 빠지면 북한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수십만의 전·사상자와 수천만 달러를 전쟁비용으로 쓰면서 우리를 도와준 혈맹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파병이 우리 국가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며 우리나라가 도약 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 파병 동의를 받아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8개월 동안 32만 5517명의 한국군이 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목숨을 걸고 파병되어 전사 5099명, 부상 1만2352명,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10만여 명이 발생하는 등 우리군의 큰 희생을 치르면서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공헌과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파병 당시 외환 보유고 1억 2000만 달러, 총 수출액 9700만 달러, 국민 1인당 GNP 100 달러이었는데 월남 전쟁으로 인하여 유입된 달러가 무려 67억 2900만 달러이었다.

첫째, 월남 전쟁으로 들어온 67억 달러는 경부고속도로를 45개나 만들 수 있는 큰 금액으로 국가 경제 발전을 견인한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북한에 절대 열세였던 국방력 강화로 국가 안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셋째, 6.25 전쟁 시 도와준 21개 자유우방국의 은혜에 보답이었고 보은의 효과로 자유 우방국가로서 자리 매김과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인 위상을 확립하였다.

넷째,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월남)에 건설운송 용역 기업들이 진출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아 7만여 명의 기술자들이 해외 진출의 노하우를 쌓게 되어 1973년 중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브릿지 역할을 하게 되었음은 월남참전의 기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개발의 신화창조로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헌은 월남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호국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 몸을 던져 지키는 자가 없고 또 애국의 희생을 몰라준다면 그 누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설 것인가.

그러나 현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소홀히 대접하고 있어 안타깝다. 보훈제도의 기본 틀을 사회 변화와 국가 발전 방향에 맞게 재정립하고 형평에 맞는 공평한 보훈정책이 바로 설 때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심과 국가관이 확립될 것이다.

도움을 받던 우리나라가 도움 주는 나라로 변화하였음을 온 국민과 후세에 알려 우리 대한민국이 역동적으로 활기를 되찾고 다시 한 번 도약하여 세계 속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 풍요롭고 살기 좋은 1등 선진 복지국가로 거듭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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