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한중일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3국 언론인 교류 프로그램(2016 TJEP)의 중국일정이 3일 마무리됐다. 지난 1일 일본 교토에서 출발해 산시성의 시안(西安)으로 가는 여정은 상하이 푸동공항에서 항공편이 연착되면서 기자 일행은 이날 밤 늦게 현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2일 오전 시안경제기술개발구의 ‘창업 인큐베이터 센터’를 둘러봤고, 오후에는 ‘3국의 역사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간담회를 가졌다. 중국 서북대학교 가오빈빈(高兵兵) 교수는 이 자리에서 당나라 시절 한국, 일본과의 문화교류에 관해 발제했다. 그는 인적교류의 대표 사례로 신라 최치원(崔致遠·856~918년) 선생의 당나라 유학과 과거 급제 그리고 관직생활을 소개했다. 역시 견당사로 중국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일했던 일본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698~770년) 선생의 행적을 설명하며 3국간 학술교류 확대를 희망했다.

이날 저녁식사를 마친 3국 기자 9명은 시안 중심가에 우뚝 솟아있는 고성에 올랐다. 연혁이 수·당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곽은 사방이 해자에 둘러싸여 있고 길이가 12㎞에, 폭이 14m에 이르는 장대한 성채다. 현존하는 고성은 1374년부터 5년간 명나라가 건축한 것으로, 중국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성곽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동행한 중국 ‘21세기 경제지’의 탄 이페이(潭翊飛) 기자는 한국과 일본에서 온 동료들을 위해 입장권을 사고, 재치 넘치는 말솜씨로 화려한 조명을 받아 빛나는 고성을 안내했다. ‘서일본신문’에서 일하는 넉넉한 웃음이 일품인 후지사키 신지(藤崎眞二) 기자는 후배들을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깨동무를 걸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한중일 기자들은 “고맙습니다”, “셰셰 닌”,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를 연발하며 추억을 만들었다. 밤 10시가 넘어 성곽을 내려 오며 우리는 황금빛으로 물든 고성을 배경으로 다시한번 단체 사진을 찍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일행 중 5명은 노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한중일 관계로 흘러갔다. 중국 기자는 “불편한 중일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이 난징(南京) 대학살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당장 사죄가 어렵다면 일본 총리가 난징 방문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 기자가 “피해 규모가 정확하지 않다”고 응수하자,,자리는 일순간 얼어 붙었다. 상기된 표정의 중국 기자는 “어떻게 지식인이라는 언론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좌석은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듯한 긴장감으로 숨이 막혔다. 그는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이 이슬람국가(IS)의 테러 보다 만배 더 잔인하다고도 주장했다. 애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아 보이는 일본 기자는 “논리가 감정적”이라며, 맞대응을 자제했다. 하지만 양측 간 거리는 한반도를 중간에 둔 중국과 일본 사이만큼 멀고 멀어 보였다.

지난해 7월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박물관에서는 ‘폴란드·독일 화해과정, 동아시아의 화합 모델’이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주도한 독일의 대학살에 의해 무려 560만명이 희생됐다. 양국 간 갈등은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항쟁 기념비를 찾아 무릅을 꿇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필자는 독일의 선례를 소개하며 일본은 난징대학살과 위안부의 아픔이 생생한 중국과 한국의 상처를 진정으로 보듬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과거사 해결을 위해 폴란드가 보여줬던 포용이 양국 관계가 1991년 우호 선린관계로 발전하는 자양분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밤 3국 기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앞에 놓고 밤새 나눴던 대화는 오늘날 3국 관계의 축소판이다. 그래도 한중일 3국 기자들의 여정은 치열한 논쟁속에도 서로 배려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은 표류하는 3국간 신뢰 회복과 협력의 길을 찾아, 12살 어린 나이에 이역만리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고운(孤雲) 최치원의 고향인 경주로 향한다.

중국 시안에서/남궁창성 cometsp@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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