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용기가 있는 산골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3남1녀 자식 가운데 장남인 그에게 유독 기대가 컸다. 전기가 안들어 오는 시골에서 신문을 읽을수 있도록 배려했다. 두메산골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됐고,미래의 꿈도 키울 수 있게 됐다. 1970년 전남 곡성 목사동국민학교에 다니던 5학년 아이는 서울에 계신다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고 시골 어르신들의 가장 큰 소원은 마을에 전기가 들어 오는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당돌한 이 아이의 편지에 화답했다. 대통령 비서실은 곡성교육청을 통해 교장 선생님을 불러 ‘뭔가 다른 아이니 잘 키우라’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재학중이던 1985년 봄.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 집권 민정당 국회의원 후보에게 6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목포시장,광주시장,전남지사를 지낸 후보에게 ‘제발 정치 좀 똑바로 해라’며 일갈했다. 그도 떡잎을 제대로 알아봤다. “자네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내가 공무원을 하다 정치권에 왔는데 정작 편지 하나 써줄 사람이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청년은 후보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전화 당번부터 후보부인 수행비서,그리고 찬조연설까지 척척 해냈다. 그의 도움을 받은 구용상 후보가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청년은 그뒤 집권당에 특채로 들어갔다. 영남당에 호남출신은 비주류였다. 공채 당료가 득실대는 사무처 조직에서 특채는 외톨이였다. 답은 노력과 근면이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주말도 평일과 똑같이 일하며 길을 개척해 나갔다.

불굴의 정치인이 있었다. 호남땅에서 영남당 후보는 손가락질 대상이었다. 1995년 시의원,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광주에서 한나라당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땐 그랬다. 한나라당은 ‘호남 포기 전략’을 선거전략이라고 했다. 그는 드라마 ‘대장금’ 주인공처럼 사모관대를 쓰고 연설을 했고,‘이주일쇼’보다 더 멋진 쇼를 보여줬지만 거대한 벽에 번번이 좌절했다. 득표율은 1.2%,0.7%에 그쳤다. 당 대표는 “어려운 곳에 혼자 용기 있게 출마해 당의 명맥을 이어줘 고맙다”고 했다. 그는 “얼마나 진정성,연속성,그리고 현장성을 갖느냐에 따라 호남도 변할 수 있다”고 당 대표에게 “호남 포기전략을 포기해 달라”고 읍소했다. 그렇게 호남의 새내기 정치인과 영남의 정치 거물이 만났다. 두 사람은 2007년 풍찬노숙의 시련기를 이겨내고 2012년 집권하며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됐고,또다른 한 사람은 정무수석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호남출신 첫 집권 보수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의 얘기다.

용기,열정,불굴로 상징되는 이정현 대표는 영호남 지역주의가 한국정치를 왜곡하는 현실에서 거위의 비상이라는 꿈을 이뤄냈다. 고향사람 마저 등 뒤에서 비웃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꿈을 이뤄냈다. 담쟁이처럼 그는 어쩔 수 없는 벽,불모의 벽,넘을 수 없는 벽을 서두르지 않고 결국 넘어냈다. 이 대표는 9일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거위의 꿈’을 노래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우리 사회를 거대한 벽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사람들,분노하고 있는 사람들,꿈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분들을 태우고 거위처럼 날개를 활짝 펴서 하늘을 날아 벽을 넘겨 드리겠다’고 했다.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 거위의 꿈을 이룬 이 대표가 이제 친박이라는 벽과 대통령이라는 벽을 넘어,국민과 역사와 대화하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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