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칠

춘주수필문학회장

그와의 만남은 신비하고 충격적인 신선함이었다.

지난 12월 2일 강원도민일보가 주관한 학술포럼 ‘조선백자 시조 양구 심룡(沈龍)은 누구인가?’.금강산에서 흘러내린 청정수가 한물 가득 풍요를 채우고 있는 옛 고을 양구! 한 해를 몰아가는 찬 바람을 귓전으로 맞으며 우리는 방산의 직연直淵 가에서 그를 만났다.켜켜이 쌓여진 역사의 이불을 제치고 그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방산 자기장 심룡! 이렇게 그는 타임캡슐을 타고 600년 만에 우리 곁에 온 것이었다.

‘이성계 발원 불사리 장엄구 일괄품(李成桂發願佛舍利藏俺具一括品)’ 일반적으로 ‘이성계 발원사리함’으로 불리는 이 유물은 참으로 기적처럼 발견되었다.1932년 10월 회양군청 직원들이 내금강면 주민들과 산불방지를 위한 방화선 개척공사를 하던 중,금강산 월출봉 아래에서 우연히 영롱한 정체를 드러냈다.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진귀한 사리함은,금으로 도금한 팔각당 모양의 외호外壺와 라마탑 모양의 내호內壺,그리고 대롱형태의 유리 사리병 등 3중 구조로 모두 일곱 점이다.백자사발 모양의 네 개 가운데 세 개는 원통형 이고,하나는 일반 형태이다.원통형 사발 두 개에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그 중 하나의 외면에 83자,다른 하나의 내면에는 173자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고,외면 굽에 ‘신미년4월 일 방산 사기장 심룡 동 발원 비구 신관(辛未年四月日方山砂器匠沈龍同發願比丘信寬)’이라는 19자가 새겨져 있다.

이 백자발의 명문銘文을 통해 홍무 24년 4월 즉,1391년 4월에 그릇이 만들어 졌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발원 자와 제작 목적,만든 시기와 장소,특히 만든 장인의 이름이 실명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대명 홍무 24년 신미 4월 일에 소원을 빕니다.…석가여래께서 입멸하시고 이천 여년이 지난 명 홍무 연간에 은월암隱月菴은 송헌 시중과 만여 명이 함께 서원을 일으켜 금강산에 보관하고….이 소원 견고함은 불조께서 증명할 것입니다.’ 월암 스님이 송헌 시중(이성계)과 지지자 만여 명의 뜻을 모아 부처님께 빈다는 내용이다.

무엇을 빈다는 것인가? 발원문의 내용을 액면그대로 해석하면 단순한 미륵하생이지만,속뜻은 쿠데타의 성공이었다.그 시점이 1391년,그러니까 조선건국 한해 전에 이런 비상한 발원문을 금강산에 묻은 것 이었다.고려조 400년의 사직을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는 역성혁명에 무려 일만의 무리가 뜻을 모았고,거기에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사람의 도공이 이름을 걸은 것.잘못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집안 전체가 도륙을 당하고 역적의 집안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 부담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단이다.이는 아마도 심룡이란 인물의 남다른 인품과 지조,재능을 이성계가 눈여겨보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심룡! 심지 굳은 행동가들이 그러하듯,심룡은 단순히 옹기나 굽는 평범한 도공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심룡은 그런 변화와 혁명의 시대에 자신의 존재이유와 사명을 정확히 깨달은 숨은 지사의 한 인물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추론할 수 있는 것은,인간 심룡의 자족적 삶과 수분지족의 처세이다.심룡은 조선 개국 뒤에 낭장(郎將) 벼슬을 얻고 ‘이원길개국원종공신록권’에 이름을 올렸으나,그 뒤에 더 이상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세상풍운을 초연히 등지고 천직인 도공의 삶을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결과적으로 그것이 이태조를 돕는 길이었고,나아가 후세역사에 그 고고한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오늘 심룡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의 처세와 세상사를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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