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석민   한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 홍석민
한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질문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창의력과 통찰의 원동력은 질문 그 자체에 있다.현재 한국의 어떤 기업에서도 질문을 자주하는 직원을 선호한다거나 채용시 우대를 한다는 소식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심지어 학문을 배우는 터전인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심지어는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장면을 본 경우도 거의 없다.오래전이지만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준 질문권을 중국기자가 넘겨받은 사례도 있다.주어진 질문에만 익숙한 한국 기자들에게 틀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이 두려웠던 모양이다.지난 박근혜정부에서도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아무런 질문도 없이 수첩에 받아 적는 공무원이 비일비재하였다.우스갯소리로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유행하여 적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공무원들의 자조 섞인 말도 들은 적이 있다.청와대 출입기자들도 질문하지 않고,질문하면 정부는 대답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언론의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이런 불완전 장치가 박근혜정부의 실패로 귀착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미국과 한국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한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다.그 차이는 질문이다.미국학생들은 질문의 질과는 관계없이 많은 질문을 교수에게 한다.그에 반해 한국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질문에 대한 두려움이 배태되어 있어 손을 들고 질문하는 행위를 금기시 한다.수업시간 마치고는 질문하지만 수업시간에는 되도록 질문하지 않는다.중요한 점은 학생들의 질문이 좋은 교수를 만든다는 것이다.학생들의 많은 질문은 교수에게 더욱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만들고 학생들은 질문을 하려고 미리 준비하는 선순환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주입식교육을 통해 정해진 답을 찾는데 익숙한 한국의 학생들에게 질문은 지식을 탐구함에 있어 방해요소일 뿐이다.논리적 비약일 수 있으나 “질문이 없는 교육”은 결국 올바른 지식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한국 사회가 정의롭고 올바르게 작동하길 원한다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사회에서도 질문을 권장하여야 한다.그 이유는 질문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신념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탈무드에 보면 답을 가르치지 말고 질문하게 하라는 명언이 있다.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과정을 중시하라는 말일 것이다.왜라고 하는 질문이 없는 한 한국의 미래에 변화는 감히 없다고 단언한다.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과학계열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도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없어서다.질문을 통해 사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과정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그래야 질문의 나비효과를 통해 세상이 바뀌어 진다.인류의 문명이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발전해 온 것처럼 한국도 발전된 미래를 위해 자유롭게 질문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국가에게,교육자에게,권력기관에게,그리고 스스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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