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석민   한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 홍석민
한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폴리페서(Polifessor)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이룬 학문적 성취를 발판삼아 입신양명을 꾀하는 교수를 말하는 조어다.이러한 부류의 교수들은 과거에도 없진 않았으나 18대 국회의원선거를 기점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문재인정부에서도 교수들이 장관으로 혹은 청와대 수석으로 발탁되었다.정치지도자가 이들을 활용하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유로 그들이 성취한 학문적 소양과 전문성을 현실에 접목하고 사회발전을 도모함에 있다고 내세운다.일견 그럴듯하다.하지만 실상은 폴리페서의 긍정적인 요인이 부정적인 요인을 초과하지 않는다.실제로 그들은 교육보다는 정치판에 더 관심을 두고 행동한다.학회에 나가서 학회장선거에 뛰어 들어 자신의 경력을 만들어 나간다.사회봉사라는 건전한 표면적 이유에 자신의 입신양명이라는 속마음을 교묘히 감춘다. 학생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물리적 시간을 다른 곳에 허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고통스럽지만 교수세계의 내부를 보자.교수의 대부분은 한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즉 연구한 분야의 폭이 깊다는 의미이지 넓다는 의미가 아니다.대부분의 교수들은 자신이 연구한 분야이외에는 잘 모른다.공부를 오랫동안 지속하였다는 의미는 대인관계보다는 자신의 연구영역 탐구에 집중하였다는 말이다.게다가 성격도 굉장히 고집스럽다.교수에게 있어 원만한 대인관계는 그리 중요한 덕목이 아니다.또한 학교행정에서도 조교의존도가 굉장히 높다.조교가 있어야 행정업무가 가능하다.이러한 교수들이 폴리페서가 되어 한 조직의 기관장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오로지 한 분야에만 전문가이며,대인관계 또한 그리 원만하지 않고,조교도 없으니 그들은 정치지도자의 눈과 귀에만 관심을 두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과거의 군사독재정부에서부터 현재까지 장관으로 입각해서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폴리페서는 기억에 없다.백번 양보하여 공직에 나가 현실정치나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싶으면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방법도 있다.더욱 깊게 참여하고 싶으면 연구년이나 휴직제도를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분야에 공무원이 되어 참여하는 것도 대안일 수 있다.처음부터 장관,수석,국회위원으로 발탁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지난 박근혜정부에서도 우리는 크나큰 교훈을 얻지 않았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교수를 만나기 위해 교수연구실 앞에서 서성이는 많은 학생들이 있다.진로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성적까지 학생들은 함께 고민해 주고 상담해 주어야 할 교수가 필요하다.그러나 폴리페서들은 당연히 학생들을 위해 눈과 귀를 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만 바라보고 있다.그들이 찾아야 할 국가나 사회의 발전에 대한 답은 멀리 있지 않다.교육현장에 답이 있다.그것을 망각하고 정치판에 기웃거려 자신의 힘을 소진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이제는 돌아와야 한다.한번 폴리페서는 영원히 폴리페서라는 말이 있듯이 그 중독에서 헤어나기 어렵다.그래서 웬만하면 권력을 추구하지 말고 갔으면 빨리 돌아와야 한다.폴리페서가 있어야 할 장소는 거기(there)가 아니라 여기(her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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