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둘러싼 비극의 역사 닮은 공영방송 파업사태
서인 집권 후 추락한 장희빈
경종 볼모 필사적 사약 거부
사후 소론·노론 정권 다툼
MB 정권 정연주 사장 버티기
고대영·김장겸 전철 피해야
사임으로 안녕·화합의 길로

역관 집안 출신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장옥정은 조선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수퍼 히로인이다.영화를 제외하고 TV 드라마만 따져 볼 경우,1971년 MBC의 사극 ‘장희빈’에서 윤여정이 처음으로 장옥정을 연기한 이래,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이미숙,전인화,정선경,김혜수,이소연,김태희 등 모두 7명이 장희빈을 열연했다.

어린 시절,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궐에 들어온 그녀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난다.하지만,명성왕후가 죽은 뒤 환궁해 뒷날 경종이 된 왕자 윤을 낳고 남인의 지지 속에 희빈을 거쳐 왕비로 책봉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폐비되었던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옥정의 삶은 정상에서 밑바닥으로 추락한다.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로 결국엔 사사(賜死)되기에.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방영되는 사극 장희빈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그녀가 사약을 마시고 죽는 장면이다.

사약을 앞에 둔 장옥정은 “아들이 보고 싶다”고 애원한다.이에 곧 죽을 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사약을 먹게 되는 어미 앞에 선 이가 14살의 경종이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갑자기 세자 윤 앞으로 뛰어들어 그의 ‘하초’(下焦)를 쥐어뜯었다고 한다.이에 경종은 실신했고 장희빈은 사약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 결국,강제로 입이 벌려져 사약을 마시게 된다.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 때문인지,아니면 어머니에 의해 하초를 쥐어 뜯겨서 그런지 경종은 36살의 나이로 단명한다.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후사도 남기지도 못해 어미가 불구로 만들었다는 세간의 상상을 부채질 하면서 말이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다.이번 주의 세상보기를 통해 장희빈을 거론한 이유는 작금의 KBS와 MBC 파업 사태가 장희빈을 둘러싼 비극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법적으로 보장된 임기를 내세우며 어디 한번 강제로 끌어내 보라는 고대영 KBS 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의 행보가 경종의 하초를 쥐어뜯고 사약 마시기를 거부했던 징희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용지즉행 사지즉장’(用之卽行 舍之卽藏).조정에서 필요하다면 명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천하를 안정시키고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2500년 전 공자께서 ‘논어’를 통해 강조한 말이다.술이(述而)편 10장에 나오는 말로,수제자 안연의 덕을 칭찬하며 안연과 자신만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영,김장겸 사장은 ‘용지즉행’은 바로 실천했지만 ‘사지즉장’에는 실패한 장희빈들이다.세상이 바뀌고 자신의 도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면 물러나야 함에도 계속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돌이켜 보면 이 같은 버티기의 원조는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던 KBS의 정연주 사장이었다.세상이 바뀌고 ‘사지즉장’의 시기가 도래했건만 임기 보장을 외치며 끝까지 버티다 결국,고발되고 체포됐으며 종국엔 해임까지 당했던 이다.비록 고발을 둘러싸고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처신은 적어도 공자가 지향했던 군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희빈은 조선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남인이 그녀 덕에 정권을 잡았다가 몰락했고,장희빈의 사사 이후엔 서인이 권력 핵으로 부상하며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져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였다.그런 면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 인간 군상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예나 오늘날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다.자신의 신념,자신의 가치관을 앞세우며 기관과 조직,백성과 국민,국가와 사직에 어떠한 생채기가 나도 상관하지 않으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정연주 사장은 정연주 사장대로,고대영과 김장겸 사장은 그들 나름대로 말이다.하지만 조직의 발전을,국가의 안녕을,국민의 화합을 원한다면 버티고 투쟁하기보다 물러남으로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은 피해야 한다.그래야 사약 먹는 현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혼절시키던 저속한 비극은 저지될 수 있다.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 되나 보다.하기야,3000명에 이르렀다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안연만이 공자와 함께 그러한 경지에 다다랐던 것을 보면 충분히 수긍은 간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형국은 정연주의 후예,아니 장희빈의 후예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 공영방송에 여전히 재를 뿌려대고 있다.


심훈 교수는 1968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세계일보 기자를 역임했다.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매스커뮤니케이션 석사,미국 텍사스 주립대 저널리즘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2002년부터 한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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