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로 영산강 건너 묘소 진입 ‘ 풍수파워’ 영화 흥행 영향”
묘소 맥로 담양 수북면 방면 출발
풍수 영향 후손·망자 모두에 적용
이한열 정신 오래 도록 기억 될 것

▲ ▲이한열 묘소 맥로도. 담양 수북면 방면에서 출발한 맥로가 영산강을 건너 완만하게 좌선(左旋)하며 이곳 망월동 구묘역에 진입한다. 묘소는 이곳 이대의 주혈에 해당하는 명당이다.
▲ ▲이한열 묘소 맥로도. 담양 수북면 방면에서 출발한 맥로가 영산강을 건너 완만하게 좌선(左旋)하며 이곳 망월동 구묘역에 진입한다. 묘소는 이곳 이대의 주혈에 해당하는 명당이다.
영화 ‘1987’의 열기가 뜨겁다.영화 속의 연희는 우연히 시위에 휩쓸려 백골단(사복경찰)에게 쫓기고 있었고,이 때 한 남학생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남학생이 입을 가렸던 수건을 내리는 순간 관객들이 술렁였다.배우 강동원이었다.그가 이한열의 역을 맡은 것은 영화의 뒷 부분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서야 알았다.

1987년 1월 14일,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겁박하던 시절이었다.박종철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대학가의 분위기는 학기 초부터 심상치 않았다.숨죽였던 학생들의 가슴에는 분노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 ▲이한열 묘소.광주 망월동 구묘역 소재.유리상자 안에는 몇 권의 노트와 영화 1987의 포스터가 들어있다.
▲ ▲이한열 묘소.광주 망월동 구묘역 소재.유리상자 안에는 몇 권의 노트와 영화 1987의 포스터가 들어있다.
그리고 4월 3일,대통령 전두환은 헌법에 따라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즉,국민들이 원하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아닌 간접선거로 후임을 선출하는 호헌조치였다.영화 속의 호헌철폐 구호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5월 27일,재야인사 150명이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을지로의 향린교회에 집결했다.호헌조치에 맞서 싸우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재야인사뿐만아니라 정치인 DJ와 YS도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군부독재의 위세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청옹성같았다.6월 9일 오후,연세대 학생들은 다음 날 있을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출정을 준비하는 집회를 열었다.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자 경찰들은 최루탄을 난사했고 페퍼포그에서는 지랄탄이 쏟아져 나왔다.맨 앞 줄에 있던 이한열은 경찰이 사람을 향해 낮게 직사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자욱한 최루가스 속에서 쓰러진 이한열을 일으켜 부축해 교정으로 옮긴 학생은 2년생 이종창이었다.이종창도 대학을 입학했을 때는 영화‘1987’의 연희처럼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나요”라고 생각했다.그랬던 그가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실을 알게된 이후 ‘운동권 학생’으로 변해 6월 9일의 현장에 있게 된 것이다.
▲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가 촬영한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순간.
▲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가 촬영한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순간.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은 30분 뒤에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전국 대학가에는 연세대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이 사발통문으로 전해지자 학생들의 분노가 폭팔했다.‘넥타이부대’라 불린 사무직 종사자들도 거리로 나섰고 일반 시민들도 가세하여 거리로 뛰어나왔다.버스를 타고 가던 시민들도 차창 밖으로 손수건을 흔들며 ‘독재타도’와 ‘민주쟁취’의 구호에 힘을 보탰다.

7월 5일,연세대 학생회관 건물에는 이한열이 운명을 알리는 검은 만장이 내걸렸다.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그는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세상을 떠났다.7월 9일,연세대 교정에서 친구들의 오열 속에서 이한열의 영결실이 열렸다.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22살의 청년을 추모하기 위해 각계의 수 많은 인사들도 참석했다.이한열의 운구행렬은 당국의 제지선을 뚫고 대한문 앞 시청광장에 이르렀다.광장에는 100만 인파가 몰려들었고 전국적으로 160만 추모객이 참가했다.그들이 외친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함성은 철옹성같던 군부독재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이한열이 세상을 떠난지 30년.장례식에서 이한열의 영정을 안고 있던 우상호는 중견 정치인이 되었고 그 옆에서 대형 태극기를 잡고 있던 우현은 영화 ‘1987’의 치안본부장 역할을 맡았다.2016년 여름,박근혜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에 배우로서 불이익을 감수할 각오로 제일 먼저 달려와 이한열의 역을 맡아준 것이 배우 강동원이었다.1987년,스물 두 살의 젊은이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87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의 독립을 이끌어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영화 ‘1987’은 제퍼슨의 명언을 화면으로 보여준 셈이다.

2017년 여름을 달궜던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그의 묘소에서 30여 m의 지점에 이한열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이곳을 두 번이나 간산했는데 지척에 있는 이한열의 묘소를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다.

영화 ‘1987’이 대박을 친 것은 이한열 묘소의 풍수파워도 적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다.대명당에 모시면 후손이 복을 받지만 망자의 명성도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이 필자가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칙이다.이한열의 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고 추모의 행렬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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