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철 전 원주시장
관광버스로 20분여를 달려 박제상 순국비에 이르렀다.‘삼국유사’의 원문 해석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기도 했지만,학창시절 기분인지 일행 모두 진지하다.현장강의를 펼치는 공주사범대 홍인희 교수의 열정과 ‘수도꼭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박학한 강의가 일품이다.이어서 만난 역사적 인물 박제상! 신라시대를 살았던 만고의 충신이다.그는 날카롭게 잘린 갈대와 벌겋게 달구어진 철판 위를 걷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라의 신하임을 꺾지 않은 채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았다.왜에 인질로 온 왕자를 구해 보내고 자신은 왜왕의 집요한 회유를 끝내 거부한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와타즈미신사다.일본내 8만개에 달한다는 신사중 특이하게 바닷가에 세워져 있는데,해신의 딸이자 일본의 제 1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의 할머니라는 토요타마를 기린다.일본 신사의 신성지역임을 나타내는 도리이(鳥居)가 5개로 모두 김해지역을 바라다보고 있어 역사뿐 아니라 신화적 측면에서도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남대마도의 이즈하라(嚴原)까지 내려와 첫 탐방지인 하치만구(八幡宮)신사에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쪽지역을 정벌하고 식민지 지배기구를 수백 년간 설치해 다스렸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숨겨져 있다.길거리에 새겨진 ‘조선통신사’도 역사의 현장으로 인상깊게 다가왔다.평소 알고 있는 내용과 많이 달랐다.조선측은 당시 북방의 후금세력이 창성하는 가운데 일본의 재침설이 계속되고 있어 이를 누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외면상으로는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를 표방하였으니,국서에 대한 회답과 피로인 송환이라는 뜻이다.총 12차례 통신사가 왕래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교류가 이루어졌고,다수의 기행문도 남겼다.그중엔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온 기록도 쓰여졌다.많은 통신사가 오갔어도 조엄만이 들여온 것이다.공직자의 본보기를 보게된다.이번 기행의 서두를 정리하면서 점점 잊혀지고 있는 옛 선열들의 충절에 대해 마음 깊이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