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광해군 10년(1618년) 8월24일 창덕궁 인정전.교산(蛟山) 허균의 친국장이 열리고 있었다.광해군을 바라보고 우의정 박홍구,의금부 당상 이이첨,대사헌 남근,대사간 윤인,승지 한찬남·유대건·정립·정규·조유도,주서 한유상,가주서 곽천구·박조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시했다.흉적의 무리로 끌려온 우경방과 현응민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응민은 “전후의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단지 신만을 정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우의정 박홍구가 말을 받았다.“적 허균이 흉역을 행한 정상은 우경방과 김윤황의 초사에서 드러났습니다만 이제 비로소 흉격을 보니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어제 형을 늦춘 것도 이미 극도로 지체된 것이므로 인심이 답답해한 지 벌써 오래입니다.죄인이 붙잡혀 나라 사람들이 경하하고 있으니 속히 정형을 명하소서.”

하지만 광해군은 생각이 달랐다.의금부 당상 이이첨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정형을 속히 해야 마땅하겠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본 뒤에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물었다.그러나 이이첨은 마음이 급했다.“도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죄인을 잡아내어 백성들이 기뻐 날뛰고 있으니 즉시 정형을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언론을 장악한 대사헌 남근과 대사간 윤인은 한술 더 떴다.“형을 늦추었으니 인심이 꺾이고 간악한 당의 불측한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그래도 광해군은 미심쩍었다.“오늘 정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정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그러자 간특한 신하들은 왕을 겁박했다.이이첨은 “지금 다시 묻는다면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라고 공갈했다.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허균의 정형을 받아들였다.

사관은 이날 친국을 이렇게 기록했다.‘이 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과 김개 두 적이 다시 국문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대로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같이 주륙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그래서 심복을 시켜 허균과 김개에게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다.또 허균의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는데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했다.그러나 그 계책은 두 적을 급히 사형에 처해 입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이날 친국에 이이첨은 왕이 정상을 캐물으려고 하자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그 당류들과 더불어 정상을 막고 은폐하며 같은 말로 협박하고 쟁론해서 왕으로 하여금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다.또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들의 청을 따라주자 이이첨의 무리가 서둘러 허균을 끌고 나가게 했다.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서 비로소 깨닫고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외쳤다.그러나 국청의 상하가 못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

당시 장안을 떠돌던 흉서를 허균이 작성했다고 고변했던 기준격의 아버지이자 한때 교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놓고 대립했던 북인의 영수인 기자헌은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교산 사후 꼭 400년이 흘렀다.특정 당파와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시대가 낳은 인재를 형장으로 몰고가 육신과 영혼을 도륙했다.그후에도 사람들은 가고 오고,또 오고 가고 있지만 허균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외마디 절규는 400년전 역사속에만 메아리칠까?교산의 400주기를 맞아 그의 유언으로 축문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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