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늙은이’ 사이,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세대간 소통단절 사회전반 확산
노인인권 인식개선 필요성 대두
영화 ‘죽여주는 여자’ 현실반영
노인 빈곤·불안·고독 등 담아
소설 ‘은교’ 청·노년 꿈 동질시

▲ 일러스트 /한규빛 
유강하의대중문화평론.jpg

우리말 가운데 단어의 끝에 ‘이’를 붙여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있다.어린이,젊은이,늙은이가 대표적이다.어린이와 젊은이는 싱그럽고 희망적인 용어로 쓰이지만 늙은이는 이와 상반된 느낌을 전달한다.낡고 폄훼된 듯한 이 단어에는 존중과 존경의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이번 주에는 기념일이 많았다.1일 국군의 날,3일 개천절,5일 세계한인의 날.그리고 그 사이인 2일에 ‘노인의 날’이 있었다.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요란하게 지나갔던 것과는 달리, 노인의 날은 그럴듯한 이벤트가 없었던 것 같다.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다.노인의 날은 늘 그래왔다.

‘노인의 날’을 ‘어린이날’과 나란히 두고 보면 그 대비는 더 선명해진다.어린이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어린이였고 그 시기의 특성을 잘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젊은이의 삶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늙은이의 삶은 그렇지 않다.노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경험이 아니라 이론과 무수한 담론에 기대에 노인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그러니 그 이해라는 것이 피상적인 담론에서 벗어나기는 좀처럼 쉬워 보이지 않는다.노인의 날에 태극기부대가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몇 해 전에 나온 영화,노인이 주인공인 ‘죽여주는 여자’와 소설 ‘은교’도 겹쳐서 떠올랐다.

‘박카스 레이디’는 ‘죽여주는 여자’의 영어 제목이다.이 영화는 예순이 넘은 주인공 박카스 레이디 소영(윤여정 분),종로 일대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가 말 그대로 ‘죽여주는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한때 파릇한 청춘을 보냈을 이들,누군가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을 이들이 노인이 되어 나누는 대화는 낮고 우울하다.“요즘 오빠 말고도 안 보이는 분들 꽤 돼요”,“모두 번호표 타놓고 기다리는 인생들이지.안 보이면 병들었거나 죽었거나 하는 거지”,“(중풍에 걸려 몸을 못 움직이는 세브르 송) 미안합니다.내 꼴이 이게… 혼자 먹지도 못해.아무것도 혼자 못해.죽을래도 혼자 못 죽어”,“(치매에 걸린 종수) 이젠 내가 너도 못 알아볼 날이 올 텐데,그땐 네가 나 좀 보내줘라”,“먹고는 살아야겠고.다들 손가락질 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소영과 남성 노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노인들이 겪는 불안,고독,결핍,궁핍을 이해하게 만드는 단서를 제공한다.

혼자서 용변을 처리할 수 없는 세브르 송의 수치심과 고통,치매에 걸려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종수의 불안감과 삶에 대한 무의지,자식과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재우의 고독과 비참.이들은 소영에게 죽여 달라고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소영은 세브르 송의 입에 농약을 넣어서,종수를 절벽에서 밀어서,다량 수면제를 복용한 재우를 방관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한다.이렇게 해서 소영은 문자 그대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소영은 살인을 했고 죄책감에 시달렸고,결국 살인죄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삶을 마감한다.그런데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를 연쇄살인범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유보되고 만다.오히려 세 남성 노인의 죽음은 “과연 누가 살인자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사회에 되던진다.육체가 노화한다는 것은 저항 불가능한 질병과 쇠잔해짐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고,경제적인 해결 능력이 약화되거나 상실된다는 것이고,고독감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는 의미이다.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중국의 노인절은 9월 9일이다.중국어로 9(九)의 발음은 ‘오래’라는 의미를 가진 ‘구’(久)와 발음이 같다.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담아 축원하는 기념일인 셈이다.확실히 과학과 의학의 발달에 힘입어 수명은 계속 연장되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의 기대치를 넘어 연장될 것 같다.그러나 이런 생명연장 기술은 삶의 질적 성장을 담보하지 못한다.오랜 시간 동안 교육을 통해 학습된 ‘노인’과 겹쳐 떠오르는 ‘공경’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는 어른들의 욕망을 성인(聖人)의 욕망과 유사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더디게 진행되는(어쩌면 퇴화하지 않는) 감정이나 욕망의 노화는 육체의 노화 속도를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소설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이렇게 말한다.“감미로운 발라드를 한 곡쯤 백 뮤직으로 거느리고 그 애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면서,낮에 있었던 일이며,앞날의 희망이며,그리운 사랑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 혁명보다 더 불온한 꿈이던가” 여기에서 청년과 노년의 꿈은 질적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 사회’라는 사회적 맥락 위에서 젊은이의 욕망은 아름다운 것이고 어르신의 욕망은 과욕이나 주책으로 읽히곤 한다.그런 독법도 가능하겠지만 그게 유일한 독법은 아니다.태극기부대,경제적 빈곤 때문에 거리로 나선 탑골공원의 박카스 레이디,시인 이적요의 목소리는 지나온 삶에 대한 미흡한 보상,다른 세대와의 소통이 어려운 단절감,삶에 대한 기본적 욕망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태극기부대로 가득 찬 광장,‘죽여주는 여자’와 소설 ‘은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간명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


>>> 유강하 교수
연세대에서 중국 고전문학(신화)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저서로 ‘고전 다시쓰기와 문화 리텔링’ ‘아름다움 그 불멸의 이야기’ 등 10여권이 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