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은 서울 여의도여고 1년

탐스럽게 익은 햇살이 조심스럽게 낡은 건물 속으로 스며든다.마치 접착제라도 된 듯 햇살은 갈라진 건물의 상처를 쓰다듬는다.햇살과 함께 밀려들어온 공기는 습기를 가득 품고서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흘러간다.몇 년 묵은 옷가지들의 꿉꿉한 냄새와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비린내,오늘 아침 갓 만들어낸 술떡의 시큼한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홀린 듯 다가가면,마침내 초라한 계단과 마주하게 된다.아래로 내려가면 계단을 닮은 지하의 모습이 나타난다.팔리지 못한 옷들과 생선들,굳어버린 떡들이 있는 곳.그곳이 바로 낡은 상가의 밑바닥이다.그곳의 공기와 처음으로 맞닿는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문도 없는 수선소의 간판이다.사실 간판이라고 하기에는 앙상한 글자들이다.‘수선소’라고 쓰여 있는 것이 전부이므로 빨간 테이프로 성의 없이 붙여진 글자들은 전부 찢기거나 긁혀 있다.그리고 그 밑에는 열한자리의 전화번호가 야무지게 적혀 있다.그 글자들을 지키는 늙은 노파의 잿빛머리칼이 선풍기바람에 휘날린다.노파의 머리칼을 따라 책상 위에 놓인 수첩도 산들거린다.그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삐뚤빼뚤한 글자들.

노파는 발로는 재봉틀의 페달을 밟고 손으로는 옷을 잡은 뒤 재봉틀에 끼워 앞으로 밀어낸다.총알이 발사되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옷에 금방 선 하나가 생겨난다.노파는 그 선처럼 자신의 이마에 박혀버린 구불거리는 주름을 매만진다.다 수선된 바지를 탈탈 털고 노파는 옷걸이에 달린 집게에 바지를 끼운다.옷걸이를 작은 행거에 매달자 바지가 앞뒤로 흔들리다 잠잠해진다.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노파는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한다.노파는 어제 저녁에 여고생이 맡기고 간 교복치마를 책상위로 꺼낸다.치마의 끝자락보다 오센티는 족히 올라간 곳에 흰 선이 그어져 있다.노파는 플라스틱 상자에서 커다란 가위를 꺼낸다.그리고 치마를 자르려던 찰나,그 앞에 운동복을 입은 청년들이 다가온다.노파는 갑자기 나타난 무리에 화들짝 놀라며 책상 귀퉁이에 있던 작은 수첩을 집어든다.수첩에 달려 있던 볼펜이 시계추처럼 흔들거린다.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던 노파는 청년들에게 다짜고짜 수첩을 내민다.옷 수선하러 오셨어요? 너덜거리는 수첩 위로 적힌 글자들이 선풍기바람에 울렁거린다.노파의 입은 박음질을 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그저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숨을 쉴 뿐이다.한 청년이 또박또박 적힌 글자를 보더니 노파를 슬쩍 바라본다.어린 아이처럼 웃는 노파의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청년은 눈썹을 꿈틀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끔한 정장 상의를 내민다.“팔 기장이 너무 길어서….”그 청년의 말을 끊고 다른 청년이 옷을 가로챈다.“야,저 사람말고 다른 사람한테 맡겨.안 그래도 비싼 옷을.”그 청년은 눈짓으로 노파의 수첩을 가리킨다.순간 노파의 얼굴이 옆집의 떡처럼 굳는다.정장을 내밀던 청년은 잠시 고민하더니 쭈뼛거리며 뒤돌아 걸어간다.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노파의 얼굴 속 그림자가 늘어진다.

청년들이 떠난 뒤 노파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수첩을 집어든다.노파는 수첩의 뒷부분을 표지 삼아 페이지를 넘긴다.앞부분에 쓴 글자들과는 다르게 크기가 제각각인 서툰 알파벳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마침내 쓰다 만 페이지가 나오고 노파는 펜을 들어 글자를 적기 시작한다.몇 해 전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아들이 추천해준 것이었다.“엄마,프랑스어 배워보는 게 어때? 아주 간단한 단어만.엄마보다 말 잘하는 사람들도 프랑스어는 잘 못해.”그 말을 듣고 용기 내어 시작한 것이 어느덧 삼개월이 지났다.그리고 노파는 지금,예순 한 번째 단어를 배우는 중이다.노파는 아들이 새로 알려준 단어를 반복해서 베껴 적는다.노파의 눈에서 옅은 햇살이 흘러나온다.그 햇살을 다시 반사하는 어눌한 알파벳들.반사된 빛은 노파의 얼굴로 흘러들어가 노파의 그림자를 조금씩 지워낸다.

“저기요,바지 통 좀 줄이려고 하는데….”노파가 한참 파리의 에펠탑을 그려내고 있는데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노파는 고개를 들며 신속히 자리에서 일어난다.그리고 잠깐 동안 수첩의 앞면이었던 뒷부분을 다시 뒷면으로 돌리며 노파는 다급히 페이지를 넘긴다.“얼마나 줄여드리면 되나요?” 노파는 재빨리 수첩을 남자에게 들이민다.남자는 글자를 읽고 약간 당황하더니 이내 가방 속에서 바지를 꺼낸다.“이 정도만요.”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첩에 뭔가를 써낸다.“언제까지 해드릴까요?” 금방 익숙해진 듯 남자는 글자를 읽으며 “이틀 뒤까지요”라고 말한다.노파는 알겠다고 또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말을 적는다.“감사합니다.또 오세요.”

노파는 다시 수첩을 내려놓고 아직 손도 대지 못한 교복치마를 집어든 뒤,자신처럼 삐걱대는 가위로 거침없이 잘라낸다.선풍기바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노파의 머리를 휘감는다.그리고 책상 위로 노파의 분신 같은 책 한 권의 페이지들이 나비처럼 날개를 펼친다.그 안에서 수첩의 양 끝에 있는 서로 다른 글자들이 조심스럽게 섞여가기 시작한다.노파의 하루하루가 꿉꿉한 냄새와 비린내,시큼한 냄새를 잔뜩 품은 채,부드럽게 허공으로 흩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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