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1623년 3월12일 혼군(昏君) 광해를 무력으로 탄핵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명분은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었다.유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조선에서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죄가 무거웠다.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리고 명에 맞선 오랑캐 금과 손을 잡은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국력을 소진해 가며 궁궐 축조를 강행해 백성을 굶주리게 한 죄도 가볍지 않았다. 광해 16년동안 전횡을 휘둘렀던 대북파 이이첨,정인홍,박승종의 머리가 저잣거리에 내 걸렸다.반정 주역인 이귀,김류,김자점 등 서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인조는 재성청(裁省廳)을 만들어 광해시절 사회적 경제적 쓰레기 척결에 나섰다.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했던 북인계열의 6품 이상 관료들도 모두 숙청됐다.폐주(廢主) 집권기 적폐 청산은 백성들의 기대와 환호속에 그렇게 막이 올랐다.

반정(反正)으로 새 시대를 표방했던 인조는 정의(正義)를 세웠을까.반정 이듬해인 1624년 1월 반정 공신 이괄이 논공행상과 중앙정치 소외에 불만을 품고 들고 일어났다.집권 1년도 안돼 인조는 허겁지겁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반군은 인조의 삼촌뻘이자 선조 후궁인 온빈 한씨 소생의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이괄이 스스로 무너지며 인조는 왕위를 지킬수 있었지만 취약한 정권의 실체를 확인했다.반정공신들이 내놓은 해답은 사찰 강화였다.제2,제3의 반란을 차단하기 위해 공안정국을 주도했다.무장들이 역모로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군사훈련도 못할 정도로 전전긍긍했다.그래도 불온한 기운은 계속 분출됐다.1627년 강원도 횡성에서 이인거가 주도한 역모사건을 시작으로 1628년 유효립 역모사건,1629년 이충경 난이 이어졌다.이충경은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폐기한뒤 ‘개국대전’이라는 개혁안을 내놓고 반정을 넘어 혁명을 꿈꿨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광해시절 대북파가 강탈했던 땅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반정공신들이 차지했다.거사에 가담했던 사병들은 훈신의 수족이 되어 그들의 식객이자 사설 경호원으로 전락했다. 반정 2년뒤 1625년 6월19일 밤 시국을 한탄하고 왕을 비방하는 흉격서(兇激書)가 군영까지 날아 들었다.여염 사이에는 상시가(傷時歌)가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아! 너희 훈신들아.스스로 뽐내지 말라.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라고 질타했다.반정은 광해 대신에 인조가 왕위를 차지하고 대북파 권신의 자리를 반정 훈신들이 대물림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힘 없는 국왕,무너져 버린 국방,그리고 피폐해진 국력은 1637년 1월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백기 투항해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 치욕을 예고했다.

신재민 사무관과 김태우 수사관의 내부 고발을 둘러싸고 흙먼지가 자욱하다.고발 내용은 보지도 듣지도 않은채 ‘너는 어느 편이냐’고 사상 검증의 잣대를 칼처럼 들이밀고 있다.고발의 진정성은 묵살하고 ‘가증스러운 사기꾼’이라며 낙인찍기에 눈이 벌겋다.말이 말 꼬리를 물고 다시 말 꼬리가 말 머리를 물며 진짜와 가짜가 뱀처럼 뒤엉킨다. 400년 전 민중들이 던졌던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라는 물음과 2019년 젊은 두 공직자가 토해내는 ‘이번 정부라면 우리 목소리를 들어줄 줄 알았다’는 탄식은 시공을 초월해 서로 맞닿아 있다.역사는 사이비가 굿판을 벌이는 현재를 읽어내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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