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100년전 그날을 만나다
항일의병,신교육 운동으로연결
강릉 8개교 중심 항일정신 확산
농업학교 독립운동가 14명 배출
만세운동 가장 치열했던 양양
1919년 4월4일부터 6일간 지속
삼척지역 학생·교사 함께 봉기

학교에 싹튼 ‘민족의식’ 나라찾기 선봉에 선 영동 학생들

초기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3·1운동은 철도 등 인프라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이 특징이다.강원도에서는 대표적으로 철원의 철도가 만세운동 확산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반면 상대적으로 교통이 열악한 강원 영동지역에서도 꾸준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강원도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에 중점적으로 일어났다.특히 강릉의 독립운동은 영동지역 의병 활동의 연계선상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을미의병 당시 민용호(閔龍鎬)에 의해 강릉에 설립된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儀所)는 영동지역 전체를 활동무대로 강릉의 대표적인 유림인 권3인규(權仁圭·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제에 저항했다.

민용호와 권인규의 항일의병 운동은 지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자각시켜 주었으며 더 나아가 강릉 지방의 신교육 운동으로 연결됐다.또 당시 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대표적으로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강릉에서도 1919년 4월4일 남대천과 강릉장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당시 남대천 보(洑) 공사를 마친 200여 농민들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괭이,삽,가래를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일제 경찰과 군대가 출동하자 시위군중은 해산됐지만 강릉 장터 만세시위는 4월 7일 강릉 중앙감리교회 교인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강릉 중앙시장에서 전개,이후 화부산과 남산에서 계속 이어졌다.

 

 

 

또 강릉의 항일운동은 사립 신교육 기관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의 씨앗이 심어져 3·1 만세운동과 강릉농업학교의 항일 학생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당시 강릉에는 8개의 학교가 있었다.운정동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이근우(李根宇)가 1900년 전후에 설립한 동진학교(東進學校),1906년 여운형(呂雲亨)이 초당의 부호인 경암(鏡巖) 최용집(崔溶集)의 후원을 받아 초당리에 설립한 야학교 초당의숙(草堂義塾),1905년 강릉 옥가리(玉街里)에 설립된 영주학교(瀛州學校),1908년 정현동(鄭顯東)이 교동 향교에 설립한 화산학교(花山學校),1908년에 한원동(韓元東)에 의해 설립된 망상학교(望祥學校),1909년에 모산하(茅山下)에 설립된 모산학교(茅山學校),1909년 신리면(新里面)에 설립된 신리학교(新里學校) 등이다.강릉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이 학교들로부터 배움의 기회와 항일정신이 함양되어 이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 주역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3·1운동 및 기타 참여자 일람표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Ⅱ’에 의하면 강릉 출신의 독립운동가 38명 중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이 14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 양양지역 3·1운동을 기염하기 위해 마련된 3·1만세운동 유적비
▲ 양양지역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3·1만세운동 유적비

 

강릉의 3·1 만세운동의 주동자가 일제 기록에 의하면 입건자 145명,부상자 82명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입건됐는지,처벌을 어떻게 했는지 등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당시 관할법원이 함흥지방법원이어서 재판기록 열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또한 당시 3·1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이나 신상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영동북부에서는 양양이 지역 3·1만세운동 지역 중 가장 격렬한 항일운동을 펼쳤다.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에 일어난 ‘양양 3·1 만세운동’은 전국 지역에서는 가장 극렬하게 일어난 기미만세운동으로 남녀노소 관계없이 많은 군중이 참가해 6일 동안 계속됐다.양양 장터 만세시위는 4월4일 양양면,서면,손양면 주민들이 계획해 진행됐다.참가한 인원은 4000여 명으로 이들은 장터와 군청,경찰서 주변에서 만세를 외쳤다.권병연·김학구 등이 총탄에 쓰러졌고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양양군 강현면과 도천면 합동 만세시위는 4월 5일 강현면 물치장터와 도천면 대포리에서 시작됐다.강현면 군중들은 대포리로 향해 도천면 군중들과 합세했다.이어 6일에는 강현면과 도천면 군중이 양양면으로 향하던 중 일본 군대와 맞부딪혔다.그러나 제지하는 군대를 밀치고 양양경찰서까지 행진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4월 9일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로 이어진 만세운동은 당시 현복면민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소위 기사문운동이라고 불리며,양양만세운동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고성에서는 3월14일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됐다.간성보통학교에 나붙은 독립운동 선전문을 본 학생들은 3월17일 간성 장날에 전교생 150명이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고성 애국지사 구국충정 숭모비
▲ 고성 애국지사 구국충정 숭모비
▲ 삼척초에 세워진 3·1 만세운동 기념비
▲ 삼척초에 세워진 3·1 만세운동 기념비
▲ 강릉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 강릉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삼척에서는 만세시위가 1919년 4월 15일 삼척보통학교에서 시작됐다.삼척보통학교 학생 김달하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교사 김기덕의 지도하에 심부윤·오원모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이들은 15일 오후 1시쯤 전교생 176명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일본인 교장은 뒷산으로 도망치고 헌병이 출동해 94명의 학생이 훈계처분을 받았다.현재 삼척초등학교 교내에 3·1운동만세기념비가 세워져 그때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다.다만 삼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 뒤에 삼척장터에서도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돼 이웃 마을에도 퍼져나갔으나 큰 규모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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