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대첩·홍천전투, 3일동안 북한군 남하 저지
1950년 6월 25일 38선 남침
서울시민 국군 승리 굳게 믿어
28일 새벽2시 30분 한강교 폭파
뒤늦게 피난 나선 시민 ‘속수무책’

▲ 인민군은 소련의 무기 원조로 탱크부대 편성을 했다.(날짜 미상)
▲ 인민군은 소련의 무기 원조로 탱크부대 편성을 했다.(날짜 미상)
#남한으로 진격한 소련제 탱크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른 새벽.38선 일대에서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인민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일대에서 수도 서울을 목표로 해일처럼 남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시민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 시각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는 전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전날 저녁,용산에 새로 생긴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파티에서 늦도록 술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6월 25일 늦은 아침,서울중앙방송은 그제야 38선 일대의 포성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그 방송에도 서울시민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 이전부터 38선 일대에서는 소규모 군사충돌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곧이어 국군은 불법 남침한 인민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이승만 대통령은 창경궁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인민군의 38선 남침을 보고받았다.곧 이어 이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 소집된 비상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전황과는 전혀 다른 보고를 했다.

“적의 공격은 전면 남침이 아니라,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주의자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우리 군을 즉시 출동시켜 침략자들을 일거에 격파하겠습니다.”

그 무렵 서울시민은 38선에서 우리 국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으로 인민군을 제압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왜냐하면 이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치며 국군 전투력을 과장했기 때문이다.“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 춘천 근교 신작로에서 한 가족이 가재도구를 이고 지고 허겁지겁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1951.4.)
▲ 춘천 근교 신작로에서 한 가족이 가재도구를 이고 지고 허겁지겁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1951.4.)
#춘천·홍천전투 3일간 남하저지

6월 26일 아침 인민군 주공 제1군단과 제2군단은 탱크를 앞세운 채 포천을 지나 의정부 부근까지 육박해 왔다.그런데도 신성모 국방장관은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우리 국군은 총반격을 개시,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우리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 국무회의에서 수도를 수원으로 옮길 것을 확정됐다.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하게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 대기 중인 남행 특별열차에 올랐다.하지만 그날 밤에도 서울중앙 방송에서는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이 대통령의 육성 담화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하지만 다른 일부 시민들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늦게야 허겁지겁 피란 봇짐을 싸든 채 한강 인도교로 달려갔다.

▲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내한하여 국군 수뇌부의 안내로 38선 이북 북한 지역을 시찰하고 있다.(1950.6.18.앞 열 중앙이 덜레스, 왼편 유재흥 장군, 오른쪽 망원경을 든 신성모 국방장관, 그 뒤 이기붕 국회국방위원장, 뒤 열 맨 왼쪽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사진출처=NARA
▲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내한하여 국군 수뇌부의 안내로 38선 이북 북한 지역을 시찰하고 있다.(1950.6.18.앞 열 중앙이 덜레스, 왼편 유재흥 장군, 오른쪽 망원경을 든 신성모 국방장관, 그 뒤 이기붕 국회국방위원장, 뒤 열 맨 왼쪽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사진출처=NARA
한편,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인민군 탱크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그러자 그는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으로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그 시각 서울 미아리고개 일대 시민은 인민군이 몰고 온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에 놀라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서울시민은 그제야 인민군의 전면적인 남침을 알고 피란길을 서둘렀지만,이미 한강다리가 폭파된 뒤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지역을 주공으로 하는 인민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은 파죽지세로 남하했지만,중부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국군 제6사단 16포병대대는 집중포격으로 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였다.당시 국군 제6사단 제2연대장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인민군 자주포를 파괴하는 등 효과적인 방어전술을 펼쳤다.이처럼 국군 제6사단은 춘천과 홍천전투에서 3일 동안 적의 남하를 저지한다.주변 전선이 계속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철수했지만 그로 인해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시간적 기회를 만든 역사적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각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주공 제1군단과 제2군단 선발대는 1950년 6월 28일 오후 3시 중앙청을 점령했다.이로써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인민군 손에 들어갔고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100만 서울시민은 꼼짝없이 인공치하에 살아야만 했다.

저자 박도(朴鍍)는

1945년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교단에 섰다.현재 원주 치악산 밑에서 글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작품집은 장편소설 ‘약속’ ‘허형식 장군’ ‘용서’ 등이 있고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등을 펴냈다.이 밖에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일제강점기’ ‘미군정 3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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