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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6·25한국전쟁과 근현대사] <6> 세기의 도박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의 날

‘성공확률 5000분의 1’ 유엔군 승부수 전세 뒤집어
인천·군산·주문진 상륙지점 선택
맥아더 “인천, 수도 수복 적격지”
이승만 9월 30일 북진 명령 발표
10월 1일 양양서 첫 38선 돌파

데스크 webmaster@kado.net 2019년 03월 30일 토요일
▲ 1950.9.14.미 군함 Mountain Mckinley 호 함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상륙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 1950.9.14.미 군함 Mountain Mckinley 호 함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상륙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의 승부수

인민군은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남짓 만에 38선에서부터 낙동강까지 해일처럼 밀고 내려왔다.유엔군 측은 속수무책으로(또는 작전상 후퇴로) 낙동강까지 밀렸다.하지만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배수진으로 친 이후,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다부동전투)을 벌였다.그러자 전선은 교착상태로 한 달이 넘도록 양측은 지루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쿄의 맥아더는 극적인 반격 돌파구를 계속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애초 이 작전 기획단은 서해안 인천과 군산,동해안의 주문진 등 세 곳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했다고 한다.미 합동참모부는 그 가운데 군산을 상륙지점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특히 미 해군 고위층은 인천만 조수간만 차와 협소한 지형을 문제 삼아 인천상륙작전은 적합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하지만 맥아더는 처음부터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그는 인천으로 상륙해야만 인민군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고 수도 서울을 쉽게 수복할 수 있다는 등의 근거를 들었다.마침내 맥아더는 미 합참으로부터 인천 상륙을 승인받았고 작전일(D-Day)을 1950년 9월 15일로 잡았다.

9월 13,14일 양일간에 걸친 미 전투기의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천은 폐허화된 상황에서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유엔군은 이날 새벽 2시께 작전을 개시해 그날 밤 10시께 별다른 저항 없이 상륙했다.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서방측 전쟁전문가들은 성공확률을 오천분지일로 ‘세기의 도박’이라고 여겼다.하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놀랍게도 성공했다.이 작전의 성공으로 그동안 방어에만 급급했던 유엔군은 마침내 총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유엔군들이 부산에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그물 망을 타고 군함에 승선하고 있다(1950.9.).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 유엔군들이 부산에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그물 망을 타고 군함에 승선하고 있다(1950.9.).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 국군과 유엔군이 홍천에서 북상하고 있다(1950.10) 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 국군과 유엔군이 홍천에서 북상하고 있다(1950.10) 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 10월 1일 양양 넘어 첫 북진

유엔군총사령부는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다음날 모든 예하부대에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묵살한 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를 경무대로 불렀다.

“우리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에 도달했는데도 어찌하여 북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 띤 목소리였다.정일권 육군총장은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을 했다.

“38선 때문입니다.”

“38선이 어찌 되었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것인가,아니면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것인가,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것인가?”

정 총장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저희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유엔군과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들은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지니고 있습니다.각하의 명령만 내리신다면….”

이 대통령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건넸다.“이것은 나의 결심이오, 명령입니다.”

그 종이에는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北進)하라.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마침내 국군은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했다.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동해안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이 날은 후일 국군의 날이 되었다.(이 대목 <정일권 회고록>에서 발췌)
▲ 전란으로 폐허가 된 춘천의 한 성당.(1950.10)
 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 전란으로 폐허가 된 춘천의 한 성당.(1950.10) 사진출처=NARA(미국 국립문서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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