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때 귀농 결심, 결혼 8일만에 실행
농사 시행착오 품팔이·막노동으로 생활
암소 20마리로 시작한 축산업 ‘회생’
“귀농 후 이웃과의 관계는 ‘무형의 자산’
조합원 1억원 이상 소득환경 만들고파”

본지는 오랫동안 일선에서 다양한 취재 경험을 가진 논설위원들이 독자들의 관심 많은 인물을 만나 일상과 철학,비전,그리고 뒷이야기 등을 집중적으로 들어보는 ‘논설위원실 초대석’을 신설했다.그 첫 번째 인물은 바로 평창·영월·정선 축협 조합장에 당선된 고광배 조합장이다.그는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취직 등을 마다하고 26살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평창으로 귀농해 농산물 가격폭락으로 망하고 품팔이와 막노동을 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 축산업으로 재기한 끝에 지난달 13일 제2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에서 도내 최연소(50세)로 당선됐다.조합장 당선후 조합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평창·영월·정선지역을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평창·영월·정선 조합장실에서 만나 귀농 후 25년 동안의 삶을 들어봤다.

첫 농사 연수입 48만원, 포기없이 달린 25년 “이제 농민 위한 삶”

대담┃권재혁 논설위원


▲ 고광배 평창영월정선축협장이 최근 평창영월정선축협에서 본지 권재혁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명준
▲ 고광배 평창영월정선축협장이 최근 평창영월정선축협에서 본지 권재혁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명준

-먼저 조합장 당선을 축하한다.이번 선거는 현직조합장의 불출마로 8명이 출마해 도내 최고의 경쟁률을 보였다.당선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평창·영월·정선 축협은 지난 20년 동안 매출이 증가하지 않는 등 조합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조합원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높아 위기를 돌파해 조합원들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적임자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향이 영월이고,평창으로 귀농한 영향으로 선거 구도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아버님의 오랜 진폐증 투병생활로 가정환경이 어려웠다고 들었다.그런데 집에서 먼 강릉고로 진학했다.또 어릴 때 꿈인 판·검사를 포기한 이유는.

“영월 북면 마차리에서 4녀1남 중 넷째로 태어나 마차초·중을 졸업했다.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진폐증 판정을 받아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남동생을 위해 공장에 다녀야 했던 누나의 희생으로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 비평준화인 강릉고교를 선택했다.판·검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려대 법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족의 희생이 길어질 것 같아 빨리 취직해 가족에게 도움을 주려고 서울대로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취직하지 않고 귀농을 선택했다.그것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평창군 용평면 도사리로.어떻게 된 건가.

“대학생 때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처음으로 농촌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그때 농민들과 사회를 바꾸기로 결심했다.1988년 8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이런 것은 한 개인의 근면 성실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대학 2학년 때 귀농해서 농사 짓기로 결심했다.그런데 어머니는 서울대 출신 아들이 농사짓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도 있어 충남 아산으로 귀농하려던 계획을 바꿨다.대학생 때 평창 농민회원들과 알고 지내 평창서 잠시 머물다가 어머니의 화가 풀리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결혼해서 귀농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혼자 귀농했나.아내와는 어떻게 만났고 반대하지는 않았는지.

“1995년 12월 2일 결혼식을 올린 지 8일 만에 도사리로 귀농했다.아내는 결혼 전 도사리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아내는 대학생 때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첫 대화가 졸업 후 귀농할 뜻을 말했더니 그 자리에서 좋다고 대답해 사귀게 됐다.귀농하기 위한 정략결혼인 셈이다.아내는 상명여대를 졸업해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서 근무해 농촌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2년 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그런데 결혼할 때 장모님이 장롱을 해주셨는데 너무 커서 들어갈 집이 없어 수소문 끝에 유일하게 도사리에 (장롱이 들어갈) 집이 있어 정착하게 됐다.”

-귀농 후 생활은 어렵지 않았는가.

“결혼 당시 1300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경제적으로 어려워 귀농한 겨울 산판 일을 했다.그 다음해 밭 1200평을 임대받아 감자를 심었는데 총 수입은 고작 48만 원이었다.그해 첫 아들이 태어나 생계를 위해 배추 작업 등 3년간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했다.품팔이는 풋내기 농사꾼을 전문 농사꾼으로 변화시켰다.농사법을 알고 동네 사람들과 친한 관계를 맺어주는 무형의 자산이 됐다.정책자금과 빚으로 밭 3만 평을 샀다.2003년 8700만 원을 들여 무·배추·감자를 심었으나 총 수입은 1170만 원이었다.7000만 원의 적자.빚만 늘어나 겨울에는 제주도에 가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고생이 많았다.그럼 도중에 농사를 포기하고 대도시로 나가 취업할 생각은 없었는지.

“정책자금을 받아 채소에 편중된 작목을 당귀·천궁 등 특용작물로 다양화하고 반장,새마을지도자,농협 대의원 등을 맡아 정보를 얻었다.김대중 정부 때 농가 부채 유예로 살아났다.2003년 1억 3000만 원의 융자를 받아 축사를 짓고 암소 20마리를 입식 했다.이거 망하면 서울 가서 취직하겠다고 결심했다.축산업이 마지막 카드였다.그 다음해 송아지 18마리가 생겨 연 36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농사로 망친 것을 축산업으로 회생했다.농사를 4만5000여 평 짓고,한우 50∼80마리가 되니 연 수익이 6∼7억 원이 됐다.그때부터 귀농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조합장에 출마할 생각은 언제부터 들었고,어떤 계기가 있었나.

“지난해 8월 대학 입학 30주년 기념으로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다.친구들이 이제 자리가 잡혔으니 농민들을 위해 일할 때가 됐다며 출마를 권유했다.60살쯤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더니 친구들이 그때 우리는 현직에 없다며 출마를 종용했다.선·후배들이 현직에 있을 때 도움받는 것이 어려움을 겪는 축협을 위하는 것 같아 생각을 바꾸게 됐다.지난해 말 농사를 끝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합장 당선으로 개인적인 농사와 한우 사육에 지장을 받는 것 아니냐.향후 축협 운영 계획은.

“농사는 어려울 것 같아 고민 중이다.한우 사육은 더 부지런해야 한다.한우를 100마리 이상 사육하는 전업농을 육성하고 대관령 한우의 명성을 높여 다양한 판매처 확보에 중점을 두겠다.복합영농을 통해 1억 원 이상의 소득환경을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젊은이 유치에 힘을 쏟겠다.농촌 땅값이 너무 올라 귀농 정착은 쉽지 않다.그래서 영농인 2세들의 귀농에 관심을 두고 있다.당선후 너무 바빠 아직 조합 업무보고를 받지 못했다.”

-자신의 농사와 축산업을 물려줄 사람이 있는가.그리고 귀농 귀촌인에게 조언한다면.

“자녀는 아들만 둘이다.첫째 아들은 농사가 싫다고 해서 포기했다.그래서 대학 동물 관련 학과에 다니는 둘째 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둘째가 가업을 잇겠다면 아버지가 30년 동안 익힌 농사법을 거저 얻는 것이다.이런 지적인 자산은 엄청난 것이다.땅과 축사는 농사와 소 키우겠다는 자녀에 물려주겠다.최근 귀농인들은 교육과 자본이 있고 주관도 뚜렷하다.그러나 농업은 토질,기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귀농할 때 작목을 정하지 말고 귀농 후 정하는 것이 현명하다.또 작목반에 들어가면 재배 기술과 판매에 크게 도움을 받는다.마지막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하면 안 된다.귀농 후 돈 버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kwonjh@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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