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민족의식 교육 독립쟁취 원동력 되다
안창호·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민족교육 중요성 강조·실천
도내 곳곳서 학생운동 발화
지역출신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
광복 후까지 항일활동 이어져

▲ 1919년 3월 17일 간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사진은 1930년대 간성보통학교의 모습.
▲ 1919년 3월 17일 간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사진은 1930년대 간성보통학교의 모습.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도산 안창호 선생 어록 中)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독립운동 실천가이기도 하지만 그는 독립쟁취를 위한 모든 기초를 교육에서 찾은 교육실천가이기도 하다.단재 신채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항일운동과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을 위해 ‘교육’을 특히 강조해왔다.당시 항일운동은 식민통치를 당한 35년의 일제강점기(1910∼1945)동안에 국한되지 않은,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아우르는,반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특히 일제에 항거해 의병조직과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투쟁과 항거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또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는 등 교육계의 역할도 컸다.

강원도의 3·1운동은 3월2일 철원을 시작으로 화천 3월3일,원주·횡성 3월27일,춘천 3월28일,홍천 4월1일,양구 4월3일,강릉 4월4일,속초 4월5일,삼척 4월15일,영월 4월21일 등 50일가량 이어졌다.의병,종교계,지역주민 중심의 항일운동도 돋보였지만 학생 중심의 독립운동은 강원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가장 먼저 도내에서 학생중심 3·1운동이 펼쳐진 곳은 춘천이다.춘천농공고등학교(현 소양고)는 1919년 3월7일 전교생이 3일간 계속해 만세운동을 벌이며 학생 항일운동을 펼쳤다.이어 3월14일에는 고성 간성보통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통해 전교생 150명이 운동장에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4월4일과 7일에는 강릉농업고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강릉에서 만세운동을 펼쳤고 4월15일에는 삼척보통학교에서 전교생 176명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강원도교육청 등에 따르면 춘천농공고등학교의 만세운동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모두 9차례의 학생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 춘천 소양고 교정에 건립된 항일학생운동 기념탑.
▲ 춘천 소양고 교정에 건립된 항일학생운동 기념탑.

 


이처럼 도내 곳곳에서 학생중심의 만세운동이 펼쳐진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꾸준히 인재양성,민족의식 고취에 나선 덕분이다.강릉의 항일운동은 강릉농업학교 항일 학생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동진학교,초당의숙,영주학교 등 사립 신교육 기관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의 씨앗이 심어져 왔기 때문이다.‘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Ⅱ’에 따르면 강릉출신 독립운동가 38명 중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이 14명으로 당시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기록됐다.

특히 이러한 학생중심의 항일운동은 만세운동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일제탄압속에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고 광복 후까지 이어져 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춘천 학생항일운동은 1919년 이후 일인 교사 배척,식민지 교육 반대,광주학생사건 연대투쟁,비밀결사 상록회 사건,독서회 사건,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1920년 3·1절을 맞아 서울의 배재학교,배화여학교 학생이 벌인 기념만세시위에서도 당시 검거된 배화여학생 24명 중 김경화·박경자·왕종순·윤경옥·이남규·지은원·한수자 7명이 강원도 출신으로 밝혀졌다.또 1931년 동맹휴교사건(전숙희),1933년 학생동맹휴교사건(임양려) 등 전국적인 학생항일운동에서도 도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존재했다.

앞서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1926년 5월 순종이 승하한 직후 학교 측이 휴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모의,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3일 뒤인 6월 13일 6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돼 수업거부와 함께 동맹휴학에 들어갔다.일제치하인 1936년에는 춘천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비밀결사 단체인 ‘상록회’가 조직돼 일제에 항거하기도 했다.

 

 

 

 

▲ 1967년 4월 25일 춘천고 교정에 건립된 상록탑.
▲ 1967년 4월 25일 춘천고 교정에 건립된 상록탑.

 


또한 학생항일운동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속에서도 교육기관 설립과 야학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의인들의 역할도 컸다.남궁억이 1906년 건립한 양양 현산학교,고성에서는 1907년 건봉사가 설립한 봉명학교,거진리 영광의숙,왕곡면 공명의숙,토성면 창신의숙,강원도내 최초로 건립된 여학교로 강원도 통천군에 1908년 10월 건립된 숭정학교,철원에 1908년 건립된 봉명의숙,춘천에서 소설가 김유정이 1932년 세운 ‘금병의숙’ 등 도내에도 야학당 건립이 잇따랐다.

양양출신 조화벽 애국지사는 졸업 후 영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육운동을 지속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무 이선실은 1925년 귀국해 원주 문막에 자리잡고 감리교회 야학당에서 학생교육에 힘썼다.

이종호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은 “학생들의 항일운동 전개는 일반시민들에게도 항거의 힘을 싣는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했다”며 “단순히 3·1운동 당시에만 항일운동이 전개된 것이 아닌 오랜기간 일제의 억압속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다바쳐 헌신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끝>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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