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도강파, 피난 못한 이웃에 부역자 낙인 찍다
한국전쟁 발발시 도망간 정부
서울 잔류시민 불순분자 몰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등 운영
미아리 고개서 부역혐의자 처형

▲ 1951년 10월 1일 미 해병대가 북진하고자 속초항으로 상륙하고 있다.
▲ 1951년 10월 1일 미 해병대가 북진하고자 속초항으로 상륙하고 있다.

# 서울 수도 ‘수복식’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후 13일 만인 그해 9월 28일.마침내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그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북상한 셈이다.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그와 함께 세상인심도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9월 29일 정오에 중앙청 광장에서 서울 수도 ‘수복식’이 열렸다.그러나 서울 수복의 감격은 잠시뿐,많은 시민들은 환멸을 맛보았다.한국전쟁이 터지자 빠른 정보로 피난을 갔던 ‘도강파’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정부 말만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들은 빨갱이,불순분자,부역자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혹독한 검증을 받아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도강파’들은 시민들을 속이고 자기들만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갔다.그들은 서울에 돌아왔다면 으레 자기들이 몰래 도망간 것을 서울시민들에게 먼저 사과하는 게 마땅했다.그런 뒤 인공치하에서 석 달간 지낸 서울시민들의 고통을 위로했어야 했다.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서울에 남았던 잔류파들에 대한 서슬 퍼런 잣대를 들이대 닦달하기 시작했다.서울시민들은 수복의 기쁨보다 부역자 검거 열풍에 가슴을 졸였다.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그들의 지시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는 환란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 1950년 9월 유엔군들이 서울 종로 한옥마을에서 인민군 잔당을 쫓고 있다.
▲ 1950년 9월 유엔군들이 서울 종로 한옥마을에서 인민군 잔당을 쫓고 있다.

# 미아리 눈물고개

1950년 10월 4일부터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부역자에 대한 일제 검거를 시작하여 11월 13일까지 5만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한 뒤 재판에 회부하여 160여 명을 사형 집행했다.당국에 인지된 부역자 수는 최종적으로 55만여 명으로,잔류 서울시민 절반 이상이었다.이들 부역 혐의자에 대한 검거와 재판은 대부분 뚜렷한 증거도 없이 목격자의 구두 진술에 의존하거나 심증만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그리하여 사적인 원한 관계로 부역 죄가 날조되거나 과장되어 억울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민으로 인공치하를 체험한 소설가 박완서는 후일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에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단은 부역의 혐의를 걸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마련이었다.비록 그들이야말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수한 양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부역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 피란을 갔다 왔다는 게 제일이었다.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라는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52~253쪽

서울 성북구의 미아리 고개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는 서울 최후 방어선이었지만 인민군 후퇴 때에는 많은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갔던 한 많은 고개요,9·28 수복 후에는 군경과 우익단체들이 좌익이나 부역혐의자들을 데려다가 처형했던 곳이다.한 많은 미아리고개는 지금도 애절한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후 군경과 우익청년단체들이 완장을 차고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후 군경과 우익청년단체들이 완장을 차고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이해연 작곡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맬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