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 강릉본사 취재국장

1999년 강원대에서 열린 ‘조선시대 표류민(漂流民)을 통해 본 한일관계’ 국제심포지엄에서 일본 나고야 대학의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는 조선시대 강릉에 표착한 일본인 4명의 표류기(강호표류기총집·江戶漂流記總集)를 소개했다.일본인들의 강릉 표류는 1756년(영조 32년)에 발생했다.그들은 표류기에서 “4월11일 마츠마에(松前)를 떠난 다음날부터 표류를 시작했는데,5월 4일이 되어서야 어선을 발견했다.몸에 하얀 것(옷)을 걸쳤는데,전에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육지로 예인되자 많은 사람들이 노와 돛대 등을 떼어냈는데,이것들이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한사람씩 말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때에는 할복시킬 것인가.아니면 ‘옛날에 당(唐)에서는 사람의 피를 빼고 살에서 기름을 짰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 장소로 끌려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드디어 대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철포 소리가 울려퍼져 선두에 가던 일행 한명이 낙마했고,우리도 철포에 타살당할 것이라고 다들 두려워했다”고 썼다.

이렇게 줄곧 불안에 떠는 일본인들에게 강릉 주민들은 따뜻한 호의를 보였다.처음 육지에 올라온 날은 여러날 배가 주렸던 점을 고려해 흰죽을 먼저 대접해 속을 풀도록 했고,농악 등 곡예를 보여주고 씨름놀이를 함께 즐기기도 했다.이들이 본국(일본) 송환을 위해 부산으로 이송될 때는 15가지의 요리가 진열된 주연을 베풀고 술과 쌀 등 전별 금품을 푸짐하게 얹어주며 석별의 아쉬움을 달했다.

영화처럼 생생한 표류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중·후기에 양국의 선리외교가 상상 이상으로 진전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왜구들이 들끓던 약탈의 바다(동해)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평화의 바다’로 변모한다.일본 측의 각종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부터 1872년까지 일본열도로 표류해 간 조선인이 무려 1만여명에 달한다.비슷한 기간 조선 해안에 표착한 일본인도 1200여명이나 됐다.표착민의 차이는 계절풍과 조류의 영향 때문이다.표착지 입장에서 볼 때 어느 날 불쑥,난데없이 나타난 표류민들은 불청객이었다.선량한 백성들인지,해적들인지,염탐 등의 적의를 갖고 침범한 외인들인지,의심을 거둘 수 없었지만,양국의 표류민들은 거의 예외없이 본국으로 송환됐다.선린 외교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1756년에 일본 표류민들이 강릉에서 만난 농악,곡예와 씨름이 ‘단오 풍경’ 이라고 짐작해본다.그들이 강릉에 도착한 것이 5월 4일(음력)이라고 하니 아마도 그 때 강릉은 단양가절,단오 축제의 열기가 뜨거웠을 것이다.‘강릉 단오’는 조선중기 강릉 출신의 천재 문인인 허균(許筠)의 기록에서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축제다.기자들의 취재 활동이 본격화된 100년 전 신문에도,‘전 조선의 명물 강릉 단오제∼인파만경’ 등의 표현을 담은 기사가 줄지어 등장한다.1926년 6월 25일자 매일신보에는 ‘강릉에서는 고래로 단오를 제일 좋은 가절로 여겨 심곡(두메산골) 농촌 부인이라도 이때는 전부 외출하는 습관이 있는 곳이라 아침부터 단오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사도 보인다.일제강점기에도 단오제 만큼은 전통의 맥이 계속 전승됐으니 강릉의 구성원이라면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일이다.

다시 단오의 계절이다.‘지나온 천년,이어갈 천년’을 슬로건으로 3일∼10일까지 열리는 올해 단오제는 세대를 아우르는 축제로 또 한번 발전적 변신을 한다고 한다.이제 단오 노래 ‘영산홍가’를 흥얼거리며 단오장으로 가자.그리고 263년 전,생면부지 일본 표류민을 감동시킨 것처럼 강릉의 친절과 매력을 선물하자.‘꽃밭일레 꽃밭일레 기화자자 영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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