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이사람] 진미경 한국외대 초빙교수
‘민법학 선구’ 고 진승록 전 학장
1961년 간첩 혐의로 고초 겪어
부친 고향 강릉 등 찾아 자료수집
진 교수 노력 끝 지난달 무죄선고
“아버지 업적 세상에 알릴 차례”

▲ 진미경 교수가 고 진승록 서울법대 학장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 진미경 교수가 고 진승록 서울법대 학장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강릉 출신인 아버지는 고향을 사랑해서 호를 ‘옥계(玉溪)’라고 지었습니다.아버지의 간첩 누명을 벗기는데 무려 58년이나 걸렸네요….”

1961년 1심 판결 후 58년 만에 강릉 옥계 출신 고 진승록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의 무죄를 받아낸 막내딸 진미경(64)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진 교수는 “아버지는 우리나라 민법 중 재산법 분야를 처음으로 저술했고,1952년부터 1955년까지 고시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친일경찰·공무원을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며 “1950년대 이미 산업발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기술고시를 최초로 도입했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바람에 업적이 잊혀졌다”고 말했다.

▲ 1953년 12월, 고시위원장 시절 고 진승록 전 서울법과대학장.(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 1953년 12월, 고시위원장 시절 고 진승록 전 서울법과대학장.(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차문호)는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및 간첩방조) 등 혐의로 1963년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던 진 전 학장에 대한 재심에서 지난 달 6일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는 진 전 학장이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영장없이 불법 연행됐고 장기간 불법 구속돼 억압된 상태에서 조사해 진 전 학장의 진술서는 임의성(자발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또 남파 간첩 이모씨의 존재 여부도 불분명하다고 덧붙였다.

▲ 고 진승록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이 1971년 2월 중학교 졸업식을 맞이한 막내딸 진미경 교수(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
▲ 고 진승록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이 1971년 2월 중학교 졸업식을 맞이한 막내딸 진미경 교수(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

이날 재판부가 재심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을 선고하자 고인이 된 부친을 대신해 지난 2015년부터 재심과정을 진행한 진 교수는 방청석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진 교수는 “아버지가 5·16 군사정변 직후 간첩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당하셨는데 마침 같은날(5월16일) 58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아 감개무량하다”며 “이는 과거 잘못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7년 국내 최초의 민법 책인 ‘민법총칙 상권’을 펴낸 민법학의 선구자인 진 전 학장은 1961년 5·16 이후 간첩 및 간첩방조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북한 간첩을 만나 남북 협상에 대한 대학생들의 동향정보를 알려주고 금괴를 받았다는 혐의로 복역했다.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진 전 학장은 상고심에서 징역 10년을 확정받았다.이후 진 전 학장은 복역 2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데 이어 15년 만인 1978년 사면을 받았지만 1985년 1월 7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법학자의 막내딸인 진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정치학 박사) 유학을 마친 후 아주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 현재 한국외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진 교수는 2011년 법원이 19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하고,재심을 받아보기로 용기를 냈다.2014년 7월부터 남편인 이수철 용인대 명예교수와 함께 부친의 고향인 강릉을 비롯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진 교수는 “부친이 생전에 혼잣말로 ‘억울하다,원통하다’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언젠가는 무죄를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치학을 공부한 이유도 아버지의 고초를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고 말했다.진 교수가 발로 뛰며 수집한 800여장 분량의 증거자료 등은 진 전 학장의 무죄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진 교수의 끈질긴 노력은 결국 5·16 군사정변 직후 간첩으로 몰려 사형 위기에 놓였다가 간신히 풀려난 고 진승록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의 누명을 58년 만에 벗기는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진미경 교수는 “무죄를 받았으니, 아버지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노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힘쓰겠다”며 “다시는 아버지처럼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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