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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사라진 마을을 찾아서]“6·25 전 이념갈등으로 고생, 북고성 연구·사료 보존 시급”

연어·황어 민물고기 많이 잡혀
니켈광산 있어 일본인 다수 거주
피난민 사기그릇 팔며 생계 유지

박창현 chpark@kado.net 2019년 07월 01일 월요일
▲ 한국전쟁 당시 고성 수동면 사비리에서 피난길에 오른 이보영(84) 실향민,엄택규 실향민,고성군 향토사학자인 김광섭 국사편찬위원회 고성군사료위원(사진 위쪽부터)
▲ 한국전쟁 당시 고성 수동면 사비리에서 피난길에 오른 이보영(84) 실향민,엄택규 실향민,고성군 향토사학자인 김광섭 국사편찬위원회 고성군사료위원(사진 위쪽부터)

# 실향민이 전하는 고성군 수동면은.

△이보영(84·고성 수동면 사비리 출생)=“6·25전쟁 다음해인 1951년 1·4후퇴쯤 속초로 피란했다.6·25전쟁 전까지 어린시절을 수동면 신대리와 고미성리의 가운데 마을인 사비리에서 컸다.국민학교는 마을에서 4㎞ 거리의 고미성리로 다녔고 초급인민학교(중학교)는 면소재지가 있는 신대리로 걸어다녔다.중학교까지도 4㎞ 가량 떨어졌다.주로 중급인민학교(고등학교)는 고성읍으로 나갔다.사비리는 120호 정도가 살았는데 남강을 중심으로 아랫마을,윗마을로 나눠 불렀다.장마가 나면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가 떠내려가 학교도 못 갔다.강가에서 천렵도 많이 했는데 연어,황어 같은 민물고기가 많이 잡혀 바다고기는 자주 먹지 않았다.그때도 바람이 워낙 세게 불었던 기억이 난다.사비리 주민들은 전주이씨의 집성촌이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 ‘이씨’가 모여 살았다.신대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던 고미성리는 150호 정도 살았는데 논농사가 많았고 감자,조,밀 같은 밭농사도 지었다.사람이 많이 거주했던 신대리는 우체국,농협이 있었다.”

△엄택규(76·고성 수동면 외면 출생)=“6·25전쟁 발발 전해인 1949년 8월 외면에 살다가 이념갈등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먼저 남한으로 보냈는데 이후 전쟁이 나고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고향에 다시 가지 못하고 있다.아무래도 살아서 못 갈 것 같다.내가 살던 외면 거리는 인근 덕산리쪽에 니켈 광산이 있어서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다.일본주재소(파출소)와 일본 소학교도 있었다.벼농사도 잘 되고 민물고기도 잘 잡혀서 풍요롭게 살았던 기억이 난다.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 인근 마을에 자주 따라 다녔는데 사비리에는 40~50여가구 정도 살았다.면소재지가 있는 신대리는 대장간이 있었고 정씨네 과수원이 있었다.당시에는 과일이 많지 않던 시기라서 과수원이 신기했다.”

# 수동면의 못다한 이야기-김광섭 국사편찬위원회 고성군사료위원

“남북분단으로 행정구역과 마을이 분할된 고성군은 남고성에 비해 북고성에 대한 연구와 사료가 상당히 부족하다.특히 군사분계선 한복판에 놓인 수동면은 DMZ로 인해 사라진 대표적인 마을이 몰린 곳이다.피난민이었던 수동면 주민들은 옹기와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좋아 남한으로 생활터전을 옮긴 이후에도 거진시장에 사기 그릇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피난 코스는 사비리에서 동쪽으로 작봉(까치봉)과 소작봉(작은까치봉)을 타고 화곡리 또는 산북리 방면으로 이동해 거주한 실향민이 많았다.북고성에 거주했던 많은 실향민이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라진 마을의 구술기록과 사료를 남겨야 할 시점이다.” 박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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