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이사람] 삼척 ‘할머니 시인’ 전옥화
2013년 문해교육반서 집필 시작
남편 잃은 슬픔 시 쓰기로 달래
작품 60여편 엮은 시집 출간
“평생 바라던 학업의 꿈,
늦게나마 이뤄 행복”


‘문지방에 귀 동냥한 한글 써보고
목이 터져라 학교 가고 싶다고 울어대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밭으로 가셨다’

-전옥화 작 ‘어린시절’



어린 시절 책보 메고 학교가는 친구가 부러워 남몰래 눈물짓던 70대 할머니가 자신만의 시집을 내고 당당히 시인이 됐다.삼척 도계읍에 살고 있는 전옥화(74) 할머니는 지난해 10월 한글을 배우면서 틈틈이 쓴 시 60여편이 담긴 시집 ‘바람같이 지나간 세월’(도서출판 해가)을 출간했다.

전옥화 할머니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그랬던 그가 시인이 됐다.


6년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여의고 우울증에 남편 옷가지만 봐도 눈물이 나던 시절 사촌 여동생의 손에 이끌려 2013년 삼척시가 운영하는 ‘찾아가는 평생학습 문해교육반’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됐다.

‘방에서 눈물만 흘리지 말고 평생 공부 못한 한(恨)이라도 풀어보라’는 여동생의 조언이 전 할머니를 시인의 삶을 살도록 했다.한글을 배우면서 전 할머니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평생 처음으로 책가방이 생겼고,연필과 지우개를 담는 필통도 생겼다.그렇게 불러보고 싶던 ‘선생님’도 생겼다.

하얀 새 공책에 한글자,한글자 힘주어 쓰다 보니 어느새 읽지 못하는 글이 없었고,쓰지 못하는 말이 사라졌다.그렇게 배운 글로 자신만의 시어를 담아냈고,그렇게 60편이 넘는 시가 탄생했다.전 할머니의 시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 도계,삼척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인생의 허망함과 회한,즐거움 등 희노애락이 녹아있다.

▲ 삼척 도계읍에 살고 있는 전옥화  시인이 자신이 쓴 시를 가리키고 있다.
▲ 삼척 도계읍에 살고 있는 전옥화 시인이 자신이 쓴 시를 가리키고 있다.
전 할머니는 지금도 시어를 구상하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까울 정도로 누구보다 즐겁게 살고 있다.

전 할머니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도계읍 차구리 화전마을에서 3남3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 매 끼니 걱정에 산과 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초교(옛 국민학교) 문턱이라도 밟은 사람은 남자 형제들 뿐이다.항상 공부에 목이 말라 학교를 보내달라고 매일같이 졸랐지만,모두 허사였다.그러다 보니 20~30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 책보 메고 학교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산으로 올라가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끼니 걱정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17살 어린 나이에 20리 떨어진 마을로 시집 갔지만,가난은 쉽사리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결혼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해 남편과 함께 탄광에서도 일을 했다.

남편은 탄광 차량을 운전했고,전 할머니는 선탄(정탄과 폐석 분리) 작업을 했다.이렇게 남편과 악착같이 살았고 넷이나 되는 자식들은 적어도 고등학교까지 모두 가르쳤다.그 중 아들과 딸,둘은 4년제 대학까지 마쳤다.

공부하지 못한 한(恨)은 있었지만,열심히 산 삶이라고 여기며 지내던 중 2012년 여름,남편이 예상치 못한 사고로 먼저 떠났다.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던 전 할머니가 찾은 성인문해학교는 삶을 이어갈 이유를 선물했다.

전 할머니가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유일한 선생님인 박군자 시인의 도움이 컸다.도계 성인문해교육반 교사로 활동중인 박 시인은 전 할머니가 “죽기 전에 시집을 내고 싶다”고 하는 말에 사비로 시집과 수필집 수십권을 선물했다.

전 할머니는 박 시인이 선물한 책을 보며 시를 쓰는 방법 등에 대해 공부했고,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물으며 글 실력을 키워갔다.그 결과 도내 문해학교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지금은 영어 공부에 도전하고 있다.

전 할머니는 “삼척 도계 깊은 산골에서 칠십 평생 살면서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학교,배우고 싶었던 공부를 지금이라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며 “늦깎이 학생이 돼 내 한을 풀며 공부를 하고,내 삶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내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을 때 학교도 못 다닌 내가 쓴 시를 읽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정민 koo@kado.net
▲ 전옥화 시인의 ‘어린시절’.
▲ 전옥화 시인의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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