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인터뷰] 조병호 화이브오션 대표
18만t급·9만t급 사선 4척 보유
국내 해운사 180개 중 20위권
2006년 설립 첫해 매출 250억원
첫 배 ‘소양’ 고향 춘천 담아 작명
화물 운송법 개발 사업 안정화
자카르타 지사·싱가포르 법인 설립
“장기적 관점, 신뢰·신용 필수
세계가 찾는 일류기업 만들 것”

▲ 화이브오션 조병호 대표가 지난달 회사 회의실에 설치된 오대양 육대주를 담은 세계지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화이브오션 조병호 대표가 지난달 회사 회의실에 설치된 오대양 육대주를 담은 세계지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원도민일보 남궁창성 기자] (주)화이브오션은 ‘불금’이라는 지난달 27일 밤 퇴근도 잊고 불을 환하게 밝힌채 업무가 한창이었다.50대 초반 나이에 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조병호(53) 대표는 사무실을 찾은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인사를 건넸다.서울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사무실 한켠에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대형 화물선의 미니어처가 자리하고 있다.회의실 한쪽 벽면은 세계 지도로 꽉 채워졌다.경자년(庚子年) 새해 2020년을 앞두고 5개 대양과 6개 대륙을 무대로 해운업을 하는 조 대표의 해외시장 개척기를 들어봤다.

▲ 화이브오션 조병호 대표가 회사 사무실에 전시된 회사소유 화물선 미니어처 앞에서  미래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 화이브오션 조병호 대표가 회사 사무실에 전시된 회사소유 화물선 미니어처 앞에서 미래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화이브오션이라는 회사 이름으로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을 누비는 배가 몇 척인가.

“회사 소유인 사선은 18만t급 2척과 9만t급 2척 등 4척이 있다.돈을 주고 빌려 운항하는 배는 35척,총 40여 척이 오대양을 누비고 있다.”

-2018년 매출이 1745억원으로 안다.2019년 매출은 얼마인가.

“작년보다 늘어나 2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본다.국내 해운사가 180여 개 되는데 우리는 20위권이다.”

- 강원도 사람이 오대양을 종횡무진 누비니 자랑스럽다.

“춘천 샘밭 유포리가 고향이다.춘천기계공고 전기과를 졸업했다.상천초교와 춘성중을 나왔다.공고 졸업후 대학을 바로 가지 않고 음악이 좋아서 팔호광장 근처에서 디제이(DJ) 생활을 했다.DJ 연합회 소속으로 조덕배,임지훈,들국화 등이 춘천에 오면 공연을 준비해 주는 생활을 했다.”

-바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DJ 생활이라는게 당시 정말 힘들고 배가 고픈 일이었다.어느 날 ‘이게 아니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안이 어려워 친구와 상의한 결과,공부도 할 수 있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해군사관학교를 가기로 했다.필기와 면접시험에 합격했지만 몸에 상처가 있어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그래서 선택한 곳이 한국해양대였다.1986년 해양대 전자통신과에 진학했고 졸업후 3년 반 배를 탔다.처음에는 오렌지나 포도 같은 과일을 실어 나르는 냉동선이었다.미국 캘리포니아와 칠레 등을 자주 갔다.나중에는 석유화학제품 운반선 승무원으로 미 텍사스 등지를 오갔다.”

-그후 어떤 선택을 했나.

“선상생활을 하다보니 육지가 그리웠다.전공이 전자통신이니까 KT(한국통신) 입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신문에 나온 택배회사 영업소 모집광고를 봤다.외국을 오가며 국제 운송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거다’ 싶었다.1993년부터 1995년 초까지 춘천에서 택배회사를 했다.하지만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당시는 택배업이 초기단계여서 어려웠다.회사를 넘기고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언제부터 해운업을 시작했나.

“1995년초 서울 서소문에 있는 화주(貨主)와 선주(船主)를 매칭시켜 주는 무역중개 회사에 들어갔다.배도 없지,아는 사람도 없지 정말 힘들었다.빌딩 20층부터 1층까지 발로 뛰며 명함을 돌리고 회사를 홍보하며 화물이 있으면 달라고 발품을 팔았다.노하우가 생기자 종합상사를 상대로 영업을 했다.대우나 삼성물산 등 종합상사와 거래를 시작했고 1996년부터 배를 임대하는 용선을 확보해 영업을 늘려갔다.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종합상사들이 무더기 도산하면서 난리가 났다.”

-신생 회사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나.

“앞날이 캄캄했다.그래서 외국으로 눈을 돌려 외국 화주들을 개발해 나갔다.철강 등 금속원자재 무역업자들이 보는 ‘메탈 블루틴’(METAL BULLETIN)이라는 잡지에 광고를 내고 외국회사 연락처를 확보해 팩스밀리로 영업을 했다.그러다 보니 갑작스런 화물이나 계약이 깨진 화주들이 우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 기회를 인연으로 영업망을 개척했다.소련 붕괴후 러시아와 중국이 개방되면서 독일,영국,스위스 등지에서 철강이나 금속 원자재 물량이 급증했는데 운도 따라줬다.”

-2006년 (주)화이브오션을 설립한 것으로 아는데.

“직원으로 남의 회사에서 11년 가까이 영업을 전담했는데 가족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도 힘들었다.그래서 2006년 2월 충정로에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자본금 1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전에 일하던 회사의 화물을 빼와 사업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어서 새 시장을 개척했다.당시 중국이 철강제품 수출을 시작했는데 이런 물량들을 유럽 친구들이 소개해 주면서 회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또 화물을 공급하는 쪽이나 수입하는 쪽에 모두 이익이 되는 운송방법을 개발하면서 히트를 쳤다.사업 첫해 25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순이익이 32억원 발생했다.순익의 절반을 종잣돈으로 자산운용사 펀딩을 통해 2007년 160억원을 주고 배를 샀다.길이 225m,6만7000t 규모의 배였다.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배 이름을 고향을 생각하며 ‘소양(SOYANG)’으로 지었다.”

-그뒤 사업은 안정됐나.

“활황기를 맞으며 2007년부터 2008년까지 1년만에 지수 그래프가 수직 상승했다.이듬해 555억원을 주고 6만800t 규모의 배를 샀다.배를 갖게 되면서 단발성 화물은 불안하니까 안정적인 장기계약 화물을 찾았다.당시 한전은 용선료를 많이 주지 못하는데 선주들은 많은 돈을 요구했다.하루 용선료를 3000만원 밖에 못 주는데 선주들은 6000만원을 원했다. 나는 당장의 이익보다 안정적인 장기계약이 답이라고 생각했다.2007년 한전과 5년 계약을 했는데 이듬해인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다.한전계약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포스코와는 2012년부터 거래를 시작했는데 장기계약은 작년에 성사됐다.”

-회사가 커지며 해외 영업망도 확충했다고 들었다.

“5년전에 자카르타에 지사를 냈다.선장이나 항해사 등 전문 관리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맡는다.하지만 다른 업무는 주로 해외에서 충당하는데 이런 일을 담당한다.이번에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했다.옛날에는 비즈니스 중심축이 유럽이었는데 이제는 중국이 블랙홀처럼 전세계 원자재를 흡수하니까 싱가포르가 중심이 됐다.유럽의 무역업자들이나 선주들이 많이 나와 있다.우리도 다국적 기업들을 상대로 영업을 확대하기 위해 법인을 오픈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있다면.

“외형도 중요하지만 알짜배기가 무엇인지 고민한다.또 장기적으로 좋은 비즈니스가 무엇인지 생각한다.수익이 나면 계속 재투자하고 있다.또 사람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직원들이 노하우를 습득해 새로운 비지니스를 구축하고 역량을 펼쳐 나가야 회사도 성장할수 있다.또 신뢰,신용이 필수다.사업초기 신생 회사에 유럽 친구들이 7만5000t 배를 무상으로 빌려줬다.뿐만 아니라 수억원 규모의 연료도 외상으로 줬다.내가 그들에게 보여줬던 신뢰가 바탕이 됐다.국내외 직원 120여 명에게도 항상 약속은 꼭 지키라고 강조한다.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정말 열심히 하라고 독려한다.”

-(주)화이브오션 최고 경영자로서 새해 포부는.

“예전에는 전세계 10대 선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근데 외형보다 꾸준하게 안정적으로 내실있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지난 14년동안 도전과 열정으로 회사를 키웠다.새로운 10년의 출발점인 2020년을 맞아 신뢰를 바탕으로 강원인의 성실과 끈기로 화이브오션을 전세계 해운업계가 찾는 일류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갈 생각이다.”

남궁창성 cometsp@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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