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혁 춘천지법 판사

▲ 조민혁 춘천지법 판사
▲ 조민혁 춘천지법 판사
“피고인과 원만히 합의하였습니다.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이 유리한 양형자료로 제출하는 피해자와의 합의서에는 보통 위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그런데 최근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공중밀집장소에서의추행)죄로 약식명령이 청구된 사건(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공판절차 없이 벌금,과료 또는 몰수에 처할 수 있는 비교적 경미한 형사사건)에 제출된 합의서를 보며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더 옳을지 고민했던 사건이 있다.

적절히 임의로 각색한 사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피고인은 야간에 춘천행 기차 안에서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졸고 있던 여성의 엉덩이를 손으로 만져 추행하고(이때 피해자는 잠결에 몸을 뒤척였고 피고인은 손을 뗐다),약 20분 뒤 다시 같은 방법으로 여성의 엉덩이를 추행했다.피해자는 피고인의 두 번째 범행 때 비로소 이를 알아차려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약식명령이 청구되면,판사는 법정형의 범위 내에서 검사가 청구한 벌금 그대로 또는 벌금 액수를 적절히 가감해 약식명령을 할 수도 있고,무죄 등의 의심이 들거나 사건을 약식절차로 종결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한 때에는 공판절차에 회부해 피고인으로 하여금 통상의 형사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다.

위 사건에서 피고인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몇 달 뒤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다며 합의서를 제출했다.합의서에는 피해자의 자필로 ‘피고인으로부터 300만원을 받고 원만히 합의했으니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해 벌금 300만원의 약식명령을 청구했는데(이 사건 범죄의 법정형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기본적으로 이 사건은 성폭력범죄 사건이고,무엇보다 피고인이 실제로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2년 전 이 사건과 죄명이 같은 범죄를 저질러 검사로부터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특히 피해자는 사건 발생 직후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TV에서만 보던 일을 실제로 직접 당해보니 너무나 큰 수치심을 느끼고,어쩌면 다시 마주칠지도 모를 피고인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바란다”고 진술했다.

피해자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한참 뒤에 이르러 피고인으로부터 소정의 금원을 지급받고 합의서를 작성해 줄 당시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피고인이 그날 그녀에게 한 행동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쉽게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어쩌면 이 사건 이후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그녀의 진짜 속마음 한편에는 피해자로서의 무력감,피해자 입장에서는 여러가지로 불완전한 형사제도에 대한 실망감도 조금씩 피어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약식명령으로 가볍게 종결할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공판절차에 회부했다.그럼에도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이 선고될 가능성은 작아 보이지만,아직 한번도 법정에 나와 재판받아 본 적 없는 피고인이,이번 일을 계기로 법정에 나와 자기 행동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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