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 강원도교육청 파견교사

▲ 김병현 강원도교육청 파견교사
▲ 김병현 강원도교육청 파견교사
졸업생이 재수 상담을 오는 건 반갑고 미안한 일이다.고3 시절 하루 종일 지지고 볶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수능 성적표를 들고 온다.여전히 날 믿어주는 고마움과 힘겨운 삶에 나도 책임이 있다는 미안함.

유진이(가명)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다.미대 입시를 선택한 유진이는 예체능 지망생이 으레 그러하듯 고등학교 내내 미술학원을 다녔고,수능 공부도 열심히 했다.국어,영어,사회탐구 공부에 매일 미술 실기 준비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산 유진이는 수능을 잘 봤고 정시로 세 개 대학을 지원했다.

유진이는 전국으로 실기 시험을 보러 다니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심지어 한 대학은 예비 4번을 받았다가 1번까지 줄어들었으나 더 이상 충원하지 않아 간발의 차로 떨어졌다.“추가 합격자 발표가 나는 일주일 동안 매일 휴대폰을 들고 살았어요.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좌절할 틈 없이 재수생활은 시작됐고 유진이는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학원에 등록했다.1년 동안 매일 새벽 기차를 타고 홍대 앞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녔다.

“서울에 가보니 제가 얼마나 평범한 실력이었는지 알게 됐어요.정말 잘하는 애들이 많더라고요.”

재수는 배움으로 성장하는 교육과는 별개로 재능의 한계를 느끼는 자존감 하락의 날들이었다.“미대 실기는 손 빠른 애들이 유리해요.짧은 시간에 얼마나 빨리 그리느냐를 보는 시험이지요.”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푸느냐를 겨루는 수능과 다를 바 없었다.

춘천에서 재수 학원도 다녔다.재수에 든 돈이 사립대학의 1년 등록금을 뛰어넘었다.하루에 10시간 넘게 공부에 매달렸다.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1년을 보내고 수능을 봤다.모의고사에서 백분위 80 아래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다는 유진이는 이번 수능에서 백분위 60 정도를 받았다.너무 떨었고 실수가 많았다.숫자 몇 개가 전부인 성적표는 차가웠다.매일 새벽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타며 비비던 졸린 눈도,엄청난 액수의 학원비도,남몰래 흘리던 눈물도 담기지 않았다.

상담을 온 유진이는 간호학과를 지망한다고 했다.놀라는 나에게 대학을 한껏 낮춰도 좋으니 취업이 잘되는 학과에 가겠단다.이 생활을 더는 못하겠다며 하고 싶은 미술 공부를 질릴만큼 했고 최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낯선 선택지에 적성을 걱정하는 나를 타이르듯 말한다.

현실 앞에 꿈을 접었는데도 생각보다 담담해 보이는 아이에게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제는 좀 괜찮아졌나 보다”하고 말했다.무표정한 아이의 대답.“더 부서질 멘탈도 없는 거죠.” 꿈 많던 스무살 청년이 이렇게 납작해져있다.

“유진아 네가 보낸 꽉 찬 1년은 결코 허투루 날려 보낸 낭비가 아니야.넌 더 단단해졌기에 다른 꿈이 너를 찾아올 때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거야.진심으로 네 삶을 응원한다.”

감사하다며 돌아서는 아이를 배웅한다.몰래 눈시울을 닦는다.유진이가 1년 동안 분투하던 서울 미술학원을 검색해보니 유명 대학에 합격한 사례와 광고만 줄줄이 나온다.유진이의 존재는 거기에 없다.답답한 입시 상담을 하고 나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끔찍한 꿈을 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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