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이라크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한 맥 마스터 장군은 인기리에 사용돼 온 프레젠테이션용 파워포인트 금지령을 내렸다.거두절미 요점만을 부각시킨 파워포인트가 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할 우려가 있고,보고서를 만드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효과적 보고수단으로 여겼던 파워포인트가 오히려 오판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파워포인트가 지나치게 단순화 혹은 과장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쟁지역 현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대체할 수 없고,실제와는 달리 상황을 충분하게 이해·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기 쉽다는 얘기다.맥 마스터 장군은 파워포인트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이 같은 사정을 반영하듯 당시 ‘뉴욕타임스’는 “미군이 파워포인트라는 적에 직면했다”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파워포인트를 이용한 보고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킴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종합적 판단을 가로 막는다는 반성이 내부에서 제기된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3일 이후 요코하마 항에 정박 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로 일본의 재난대응 역량이 도마 위에 올랐다.재난대응 선진국을 자처해 온 일본이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다 실기를 한 것이다.일본은 3700여 명의 승객 전원을 선내 격리조치를 내렸으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는커녕 확진환자가 급증하면서 사태를 키웠다.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없고 재난 매뉴얼에 구체적인 관련규정이 없어 적절한 대응시점을 놓쳤다는 것이다.

미군의 파워포인트가 현장의 복잡한 상황을 다 담아내지 못한 것처럼,일본의 매뉴얼이 코로나19의 방어벽이 되지 못했다.파워포인트가 담지 못한 위험이 또 다른 화근이 되고,매뉴얼에 누락된 재난은 더 큰 재앙이 된다.매뉴얼은 재난대비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맹신하다가는 수렁에 빠진다는 것이다.파워포인트의 과장과 누락,매뉴얼의 바깥에 속수무책의 재난이 숨어있는 것이다.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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