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번지고 어둠이 스민 소설, 물리적 명암 넘은 ‘삶의 울림’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있다.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

감히 나는 화가 렘브란트처럼
나만의 독특한 정념과 울림을 넣어
소설의 이미지를 재창조하고 싶었다.
삶의 기쁨과 아픔까지 그 빛과
그림자에 실음으로써 단순한 물리적
명암을 뛰어넘어 인생의
빛과 그림자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굳이 ‘한국의 1930년대 순수문학에서 가장 빛나는 예술적 감동을 주는 소설가’라는 찬사가 붙어서만은 아닐 것이다.이상하게 나는 위 소설을 읽다가 요 대목에만 오면 늘 입가에 홈홈한 미소가 번진다.‘문학적으로 육친을 만났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인가.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그윽이 결 고운 향기가 전해 오고 문장의 행간에 감빨리는 맛이 있다.학창시절 때 반드시 ‘밑줄 쫙∼’ 그었던 금싸라기 명구가 뒤를 잇는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역시 문인의 글솜씨란!어쩜 이렇게 짧지만,제자리에 콕콕 놓인 듯하게 적절한 글을 쓸 수 있을까.이효석의 글은 잘 자란 나무 같아 보인다.소박하되 따뜻하면서 낙관적이고,중심이 잘 잡힌 글맛은 숙면 후의 아침처럼 상쾌하기만 하다.우리말이 가진 빛깔과 소리,거기에 서늘한 그늘까지 거느리고 있다고 표현하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꽤 오래 되었다.내가 ‘메밀꽃 필 무렵’을 그림으로 옮겨보고 싶었던 것이.흐릿한 기억을 되작여 보면 이십칠팔 년은 족히 되었을 듯 싶다.습작 같은 소품까지 치면 대여섯 작품은 될 것인데 여기 소개하는 이 작품이 가장 최근작이고,크기도 가장 크다.완성하고 난 뒤 개인전은 물론 여타 전시에 선보이지도 못하고 팔려 버려 아쉽다.다른 곳은 차치하더라도 고향 춘천의 시민들에게는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수원지방법원 건물에 가야 볼 수 있다.

글쟁이들이 쓰는 표현 중에 ‘글에서 냄새가 난다’라는 말이 있다.자기도 모르게 글이 누에고치에서 실 풀려나오듯 술술 써질 때 우스갯소리처럼 사용하는 말이다.화가인 내게도 그렇게 ‘냄새가 나는’ 문학의 소재가 있게 마련이다.신 내림 받는 무당처럼 그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신열을 앓아야 하는 소설이나 시가 있는 것이다.그 대표작이 바로 이 ‘메밀꽃 필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 소설에 빨려들게 한 것일까.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라고 해야겠다.첫째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감히 나는 화가 렘브란트처럼 나만의 독특한 정념과 울림을 넣어 소설의 이미지를 재창조하고 싶었다.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서게 장터로 연결되는 길에서 인생을 보낸 이 땅 장돌뱅이들의 삶을 깊은 음각의 명암법으로 표현하고 싶었다.삶의 기쁨과 아픔까지 그 빛과 그림자에 실음으로써 단순한 물리적 명암을 뛰어넘어 인생의 빛과 그림자로 승화시키고 싶었다.렘브란트의 일생이 그러했듯 아낌없이 땀 흘린 사람들의 삶의 영광과 몰락을 그려보고 싶었다.

두 번째가 중요한데 지면 관계상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다음 호로 미룬다.90여 년 전,설 휘어놓은 갈퀴 같이 뻣뻣해 뵈지만 심지는 무던하기 그지없었던 장돌뱅이들의 삶의 단면을 더욱 깊게 파고들고 싶다.

해량(海量) 있으시길 빈다. <이광택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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