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술을 금하려 하지만 / 오늘도 금하지 못했다. / 금하는 것이 마음에 섭섭한 줄만 알고 / 내몸에 좋은 것은 믿어지지 않네. / 이제 비로소 금한 것이 좋은 줄 알고 / 오늘 아침에 용감하게 끊었네. /(하략)” 중국 동진과 송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이 남긴 ‘지주(止酒)’라는 시다. 40대 초반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른 그가 술을 끊는 과정의 소회와 애환이 묻어난다.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오류(五柳) 선생이라 자칭했던 시인이 말년에 겪었을 가난과 병고(病苦)의 번난(煩難)함을 마치 곁에서 보는 듯하다. 전원을 벗삼기로 작정한 시인에게 통음(通飮)의 기쁨마저 주어지지 않았는가하는 안타까움에 먼 뒷날 추억하는 이의 마음마저 처연하다.

당나라 때 시성(詩聖)으로 불린 두보(杜甫)도 “술 빚은 흔히 있는 것, 어디 가든지 있게 마련이고 / 인생은 칠십 살기도 힘드니 실컷 마시고 놀것이니라(酒債尋常行處有/人生七十古來稀)”고 했고, 옹완(翁緩)은 “백년 동안 천 번은 취해야 할 것이다. / 한 잔 술이 만고의 시름을 씻나니.(百年莫惜千回醉/一盞能消萬古愁)”하고 읊었다.

그러나 영국 속담은 ‘술은 변절자다. 처음에는 벗이지만 나중에는 적이 된다’며 음주의 폐해를 경고한다. 논어(論語)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도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지만, 난(亂)의 정도에 미치지 않게 했다’고 말이다. 술이 때로 고난을 이기고 활력을 주는 묘약이지만 절제가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먹으면 약이요, 지나치면 독이 된다’ 는 것이 술이다.

그러나 세태는 여전히 독주와 폭음을 강권하는 쪽이다. 각종 사건·사고와 질병 등 술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때마침 최근 국제보건기구(WHO) 건강도시연합에 가입한 원주시가 기존 3분의 1 크기의 소주잔, 2분의 1크기의 맥주잔 등 ‘절주잔’을 배포하며 이색 절주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음주의 절대량을 줄이고 건전한 음주문화를 확산시켜 나감으로써 ‘건강도시 원주’의 위상을 새롭게 구축하겠다는 취지다. 오늘 저녁 술자리는 절주잔으로 건강도시 원주를 위해 ‘건배’를 외쳐보자.

김상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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