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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은 하나지만/ 열아홉 줄 곱하기 열아홉 줄로/ 길은 팔방으로 열려 있다// 이 길로 갔어도/ 긴 한판의 인생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어깨를 짚어 왔을 때/ 모른 척 비껴갔으면 좋았을 걸/ 공연히 패를 걸어/ 소탐대실하고/ 때로는 대마를 죽이고/ 돌 던지고/ 후회해 본들/ 무를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정석(定石)은 있지만/ 정석을 알고 정석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고수(高手)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전직 언론인 이기종 씨의 시집 ‘인도소는 울지 않는다’에 수록된 ‘바둑해설가’라는 시다. 그는 굴지의 항공사에 근무하다 언론인으로 전직, 신문과 방송을 오가며 보낸 20여년의 언론인 생활을 얼마 전 마감했다. 그의 인생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이 읽혀진다. ‘정석을 알고 정석을 버려야 진정한 고수’라는 금언을 그의 눈을 통해 다시 접하는 묘미가 각별하다. 정석을 버려야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정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제에 있는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강당에는 ‘이정합 이기승(以正合 以奇勝)’이라는 구호가 걸려 있다. 손자병법의 병세(兵勢)편에 나오는 ‘범전자 이정합 이기승 고선출기자 무궁여천지 불갈여강하(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竭如江河)’라는 대목에서 따온 말이다. 무릇 전쟁에 임하는 자는 올바름(원칙)으로 대적하고, 기이함(변칙)으로 승리한다. 그러므로 변칙을 잘 운용하는 자는 천지처럼 궁색해지지 않고 강물처럼 고갈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명분과 원칙의 든든한 기반 아래 적절한 임기응변의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둑판이나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항용 바둑과 전쟁에서 비유되는 인생사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원칙이 덜 중요하다는 것도, 변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양자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조화와 호응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리라. 원칙의 뒤주 속에 스스로를 가둬서도, 변칙의 잔꾀에만 탐닉해서도 바둑이든, 전쟁이든, 인생이든 성공하기 어렵다는 교훈이 담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테면 삶은 원칙과 변칙의 교직(交織)인가. 김상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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