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의암대상 수상자 인터뷰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던 의암 유인석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한 제 13회 의암대상 시상식이 1일 오전 10시 의암유인석선생 유적지에서 열린다. 강원도와 의암유인석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석 강원도민일보 사장)가 주최하고 강원도민일보가 주관하는 올 의암대상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학술부문 홍영기 순천대 교수와 공로부문 권희동 전 광복회 도지부 사무국장의 수상 소감 및 향후 계획 등을 들어본다.



“강원·호남 특징 비교 한말의병 새 면모 연구”

[학술부문]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

-의암 대상 수감 소감은.

 

“지금까지 호남의병을 비롯한 한말의병을 약 20여 년간 연구해왔다. 의암대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및 강원도청, 강원도민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하신 의암 유인석 선생을 기리는 상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근대 의병사에서 의암 선생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첫째, 위정척사운동에서 전기의병운동으로 전환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의암선생은 의병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거듭 전환을 한 사례이기도 하다. 위정척사와 의병, 그리고 독립운동을 계승하는 전형적인 노선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점에서 각별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의암선생은 한말의병의 투쟁전략을 가장 적절하게 수립,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해외독립운동근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북계책’은 매우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1910년대에 간도와 연해주는 해외독립운동의 중심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의암선생은 외세 침략시 ‘처변삼사’를 통해 진정한 선비들의 행동지침을 제시한 점도 주목된다. 이처럼 의암선생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킨 지행일치의 의병장이었다.”


-의암선생 선양사업 방향과 앞으로의 계획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의암 유인석 선생의 백절불굴의 정신과 1909년 음력 11월 의암 선생이 관일약에서 말씀하신 4愛(애국·애도·애신·애인)의 정신으로 더욱 의병연구에 전념하겠다. 의암 유인석 선생과 호남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송사 기우만 선생과의 연계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보고 싶다. 아울러 강원의병과 호남의병의 특징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도 추진해볼 생각이다. 그러한 연구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한말의병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또한 경기도와 강원도를 기반으로 삼았던 화서학파는 호남을 무대로 활동한 노사학파와 사상적으로 매우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그 때문인지 양 학파 사이에 빈번한 학술적,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의병항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연합을 시도하거나 동시다발적 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한 활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1957년 출생 △전남대 국사교육과 △서강대 사학 석사·문학박사 △前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연구지원심사위원 △前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서훈공적심사위원 △前 순천대 지역개발연구소장 △매천황현기념사업회 매천상(학술부문) 수상





“의암선생 우국충정 시대 정신으로 새겨야”

[공로부문] 권희동 전 광복회 도지부 사무국장

-의암대상 수상 소감은.

 

“부족한 사람이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니 두려움이 앞서는 한편 뜻 깊은 생각과 함께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상을 받게 되면서 먼저 국운이 암울한 시기에 선생님이 남기신 유필이 생각난다. 그 내용은 ‘대안’, ‘활흉’, ‘경척’, ‘건각’이었는데 가슴은 넓게 펴고 곧은 몸자세로, 튼튼한 다리로 힘차게 달려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20개성상을 광복회에 몸담아 일하면서 의암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민족정기로 승화되는데 미력한 본인이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주는 상이라 생각되어 가슴이 벅차다.”


-한국 근대의병사에서 의암선생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먼저 항일독립운동사를 크게 세 단계로 요약하여 정리하면 그 1단계가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항일 투쟁이고 2단계가 국권 회복을 위한 3·1 독립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며 3단계가 민족사회운동인 애국계몽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으로 구분된다. 그 첫 단계인 의병항일투쟁에서 의암선생은 그 중심에 있었고 국외로 망명한 선생은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을 총괄 지휘하는 의군 13도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국권회복을 위한 역량을 결집한 우국충정은 근대의병사의 핵심적 가치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시대정신으로 새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펼친 의암선생의 의병운동 가치와 의의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해외로 망명한 선생은 1차 기착지인 러시아영(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곳 의병진을 격려하고 관일약을 지어 거류민의 결속과 의무유통을 제정, 의병단 질서와 명령체계를 확립하고 1910년 6월 의군 13도 도총재에 취임했다. 국권이 상실된 경술국치의 소식을 접한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명회 조직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세계열강에 발송하고 일본 정부에 각서를 보냈다. 만주로 이동한 선생은 1915년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무리할 때 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운동단체와 김구, 안중근 선생 등을 격려하며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민족혼을 일깨워준 선구자였다고 생각한다.”

△1933년 출생 △경희대 한의학과 중퇴 △전 대한가족계획협회강원도지부 전임강사·업무과장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전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모범 공무원 표창 △강원도민홍보교육 도지사 감사장 수상 정리=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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