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영

편집부장

터키 이즈미르 남서쪽에 위치한 에페소스. BC 7∼BC 6세기 아르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번영을 구가했고, 성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전했던 대표적인 기독교 성지다. 때문에 지구촌 곳곳에서 몰려든 순례자와 방문객들로 이 일대는 사철 장사진을 이룬다. 사람들은 흩어진 대리석 조각과 부서진 건물들을 만지며 고대도시의 영화를 상상한다. 저자거리 터에서 옛 소아시아 상인들의 흥정 소리를 듣고, 원형극장 한가운데 서서 ‘오르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을 느낀다.

하지만 에페소스의 유적은 폐허에 다름 아니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상처 입은 멸망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거칠고 흉진 부분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방문객은 더욱 깊은 감흥에 빠져든다. 상상을 자극하는 ‘폐허의 미학’이 진가를 발휘하는 공간인 것이다.

잠시, 아찔한 가정을 해본다. 만약 공명심에 가득 찬 어느 권력자가 후대에 유행했던 방식으로 에페소스를 재개발하거나, 잘려나간 대리석 건물을 시멘트로 채워 넣는다면…. 혹은 고층아파트를 세우고, 대형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을 유치한다면…. 아마 터키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재앙이 될 것이다.

새삼, 역사와 세월을 지켜온 그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은 비단 에페소스뿐만 아니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홍콩을 찾는 외국인들은 곳곳에 펼쳐지는 낯선 풍경에 의아해한다. 훤칠한 현대식 빌딩 사이로 흉물처럼 보이는 건물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도시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장면을 한국 관광객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홍콩정부는 개인 거주지라도 수 십 년 이상 된 건물의 철거를 제한해 도시의 다양성을 유지하려 한다. 이웃 마카오도 마찬가지다. 시가지의 옛 모습을 보전하기 위해 역사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건물의 철거나 재건축은 엄격하게 심사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법률상 건물을 함부로 철거할 수 없다. 수도원이 레스토랑으로, 우체국이 호텔로, 용도는 바뀌지만 건물은 유지하면서 고금의 조화를 이룬다. 건축물마다 연도 표시를 해 도시의 내력을 읽게 한다. 이들 도시들이 그 곳만의 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본다. 천박한 공명심과 무분별한 개발논리가 판치는 사이 얼마나 많은 지역의 역사가 지워졌나. 관광과 도시개발의 당위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마을과 도시의 이야기를 파괴하는 과정은 아니었나.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선의를 감안하더라도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시간이었다.

“한국은 신생국가인가. 50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데, 도시 전체가 새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로 뒤덮여 있다.”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이렇게 소감을 밝히곤 한다.

그러나 낙담할 때는 아니다. 우리에겐 아직 남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켜야 할 유산을 굳이 조선왕조 이전의 선대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있는 속초 아바이마을,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등록문화재에 지정된 옛 춘천문화원건물, 6·25전쟁이 남긴 유산인 춘천캠프페이지, 선사유적지이자 춘천시민의 오랜 휴식처였던 중도유원지, 70~80년대 전방군인들의 문화가 남아있는 인제 천도리와 화천 사방거리, 산업화 시대를 회고할 수 있는 탄광지역의 광산문화…. 모두가 애틋한 이야기를 간직한 우리의 역사자산이다. 도시 발전과 주민 편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전부 혹은 일부를 남겨놓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대의 원망을 부를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다. 경우에 따라 ‘뭔가 하지 않는 것’도 훌륭한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남겨 놓아야 할 뜻 깊은 장소에서 또 뭔가를 할까봐 불안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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