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정록

경제부장

우리사회가 갑을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사실 지방에 살다보면 사는 것 자체가 ‘을’일 때가 많다. 어느 개그맨이 “마음만은 특별시다”라고 외칠 때 우리는 모두 웃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꼭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차별이 구조화된 지방과 중앙의 한 단면이 너무 솔직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젊은 직장인들의 평균급여와 인사상의 불이익, 교육과 문화에서의 불평등은 지방이라는 공간성 그 자체만으로 을의 한계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요즘 지방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갑을 관계를 둘러싼 전쟁터가 되고 있다. 진영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싸움은 더욱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야권의 한 국회의원이 최근 펴낸 책제목이 ‘을을 위한 행진곡’이고 어느 교수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종언으로 나아가도록 해야한다”고 독려하고 나섰다. 갑을관계가 ‘눈물 닦아주기’ 수준이 아니라 을의 반란으로까지 전개되는 셈이다.

그러자 너무 당연하지만 곳곳에서 저항이 시작됐다.

최근 들어 보수언론들을 통해 본 갑을 논란은 거의 계급투쟁 수준이다. 노동이나 재벌, 하도급 등과 관련한 갑을논의가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갑을이 혼재돼 있는 상황에서 갑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것은 복잡한 경제시스템을 지나치게 단순화, 경제 토대마저 흔들게 될 것이라는 깊은 우려감도 보이고 있다.

다시 지방에 사는 을의 입장으로 돌아와 보자. 최근의 논의는 지방의 눈에서 보자면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논의의 상당수는 상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방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의 재원확충과 분배, 그리고 지방의 역할과 생존을 재조명하는 미래적 가치와 관련한 논의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중앙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는 하지만 가소로운 부분도 있다. 이제 논의가 시작되는 마당에 지레 폭력적이라거나 계급적 시각으로 해석하려 드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재벌의 성장동력과 일자리 창출은 결과적으로 피자 체인점, 베이커리, 커피전문점 등 골목상권을 장악하는 쪽으로 귀결됐다. 최근 재벌기업의 농업생산 진출에 토마토재배농민들이 반발하고 나서자 한 언론은 “을의 가면을 쓰고 벌이는 또 다른 횡포”라고 농민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과연 그들에게 지역의 중소상인이나 농민들의 생존권은 재벌의 성장동력을 위한 구색 갖추기에 불과한가.

성장논리로 무장한 그들의 배려는 언제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전제한다. 동반성장과 관련한 논의가 몇 년째 지지부진한 것은 명분이 ‘실리본색’의 기업논리를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갑을관계가 시작부터 저항에 직면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같이 살아보자는 말에 “사회주의인지 뭔지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다”는 재벌회장의 논리로 다시 돌아간다면 갑을논란은 기대할 것도 없다.

이솝우화에 ‘친구가 된 생쥐와 개구리’ 이야기가 나온다. 서로 사이가 좋지않던 생쥐와 개구리는 친구가 되기로 하고 서로 발 하나를 묶어 함께 뛰는 친구놀이를 하기로 했다. 친구맺기에 관심이 없던 생쥐는 개구리를 골탕먹이려고 닭장으로 뛰어가지만 그곳에서 고양이를 만난 생쥐는 자기가 살기 위해 죽어라고 닭장에서 도망친다. 개구리는 생쥐가 자기를 닭으로부터 살려주기 위해 뛴 것으로 착각하고 친구가 된다.

이렇듯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출발한 갑을의 친구맺기 혹은 지방과 중앙의 상생은 가능할까? 지방, 그 영원한 ‘을’은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과연 발을 내밀어야할까? 줄을 끊을 수도 그렇다고 묶인 채로 끌려갈 수도 없는 이 강요된 현실, 그것은 지방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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