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열

영동본부 취재국장

최근 한 독일인이 강릉 경포에 평생 거처를 마련했다. 카페(유디트의 정원)를 차리고, 안팎을 모두 독일식으로 꾸몄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자연 정원으로 평가되는 경포에 독일식 정원이 더해졌으니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는 “경포에서 ‘영동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한국인 반려자를 만나 서울에 온 뒤 지독한 향수병에 우울증까지 겹쳤던 그녀가 관동팔경 제1경인 경포를 만나 인생의 쉼표를 찍은 것이다.

독일 브레멘대와 영국 요크대에서 정치 철학을 공부한 인텔리로 3개 국 9개 도시에서 살아 본 ‘도시 유목민’인 그녀가 첫눈에 반한 경포의 속살을 최근 제대로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경포호 주변 27만㎡에 습지가 복원되고, 지난 50여년간 자취를 감췄던 멸종위기 2급식물 ‘가시연’이 그 습지에 되살아난 것을 기념해 경포 일원에서 ‘강릉 바우길 가을걷기축제’가 열린 것이 계기가 됐다.

강릉에서 생활하면서도 “경포의 이런저런 것을 보았냐. 경포를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물으면 답변이 군색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이번에는 걷기 코스의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행사 주최측 일원으로서 10㎞ 코스를 모두 돌아보는 수고(?)를 자청했다.

그날 필자와 함께 경포 주변 바우길을 걸은 사람은 줄잡아 2000명에 달했다. 단풍 절정기 주말인데다 류현진 선수가 소속된 미국 LA다저스 야구단이 월드시리즈 진출에 운명이 걸린 벼랑끝 경기를 하는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경포로 쏟아져 나왔다. ‘경포’와 ‘바우길’이 지니고 있는 브랜드 가치가 “행사 참가자가 적으면 어쩌냐”는 걱정을 보기 좋게 기우로 돌려 세운 것이다.

그날 경포에서 맛본 가을은 토요일마다 배낭을 꾸리는 필자에게도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가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윽하기 그지없는 호반의 가을, 야생화와 수풀이 제멋대로 자라난 습지, 300년 역사를 담은 고택 선교장(船橋莊), ‘솔향 강릉’의 상징인 명품 소나무 숲길과 해변까지, 경포는 없는 것이 없는 종합선물세트였다. 특히 1960년대 경포호 주변이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사라졌던 ‘가시연’ 종자가 무려 50여년간 땅속에 숨어 있다가 최근 습지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되살아난 ‘생태 기적’의 현장은 전율할 만한 자연 미학의 극치였다.

독일인 유디트 크빈테른(42)씨는 그 경포에 독일식 정원을 꾸미고, ‘나는 영동사람이다’라는 책까지 냈다. 그녀는 “이제 독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 또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지만, 영동은 그렇지 않다. 나는 여기서 늙어가고 싶다”고 경포 생활의 만족감을 큰 울림으로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산과 물이 천하의 으뜸(山水甲天下)’이라고 평가한 곳, 강릉과 경포의 매력을 21세기에 벽안의 외국인이 생활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경포에는 이런저런 시도가 진행 중이다. 호텔이 신축되고, 콘도 리조트도 증축에 들어간다. 화석 연료 제로화 시스템을 구현하는 ‘녹색도시체험센터’가 시험가동에 들어간 데 이어 대형 아쿠아리움을 겸비한 ‘석호 생태관’ 건립도 준비되고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원주∼강릉 복선전철도 깔리고 있으니 앞으로도 경포 주변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건물의 위치는 그곳이 맞는지, 도로와 교량, 탐방로는 이곳을 통과해도 되는지, 사람들의 출입은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지, 살피고 또 살펴 경포의 생태관광매력에 화룡점정을 더해야 한다. 그런 고민이 동해안 곳곳의 관광지에서도 화두가 되고, 실행으로 옮겨져야 “영동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는 독일인의 선택도 후회 없는 것이 된다.

5년, 10년 뒤에도 독일인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면 경포의 변화는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영동사람으로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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