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성공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100명이고 실패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私生兒)라는 말이 있다. 춘천~속초 간 동서 고속화 철도 사업이 국가 재정사업으로 확정된후 도내외 정치권을 지켜 보면서 스쳐간 생각이다. 공다툼이 볼썽사납다. 2024년 서울발 속초행 고속열차가 첫 기적을 울릴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은 바로 300만 강원도민이다. 1987년 첫 대선공약으로 등장한후 30년만에 사업계획이 확정됐다면 지도자들은 ‘만시지탄의 아쉬움’을 앞세우고,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을 내놔야 한다. 또 이탈리아 철도참사에서 보듯 단선 철도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른 시일에 복선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건의해야 하는게 상식이다. 그럼 동서 고속화 철도사업 확정 과정을 되집어 보면서 진짜 ‘부모’를 찾아보자.

국토교통부는 지난 6일 오전 10시 한 장의 보도자료를 냈다. 국토부가 이날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제19차 재정전략협의회에서 ‘민자철도사업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핵심은 사회간접자본(SOC) 분야 ‘재정투자 축소 기조’에 맞춰 지난달 27일 확정한 제3차 국가철도망계획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붙었다. 이날 공개된 민자대상 철도망 구축계획에 춘천~속초 간 단선 전철 94.0㎞가 포함됐다. 그후 5일 뒤인 11일 오전 8시 국토부는 또 다른 한 장의 보도자료를 냈다. 현 정부 공약사업인 춘천~속초 철도사업이 예비 타당성 조사결과, 사업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돼 사업추진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또 조속한 시행을 위해 국가 재정사업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우선 검토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5일 만에 국가 정책 방향이 180도 급선회한 것이다. 나라의 곳간이 비어 민자를 유치해 철도를 놓겠다던 정부 방침이 유턴해 2조631억원의 국가재정을 투입해 철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5일 간 정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7일 오전 10시 청와대 영빈관.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정부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청와대에서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했다. 먼저 박 대통령의 인사말과 모두 발언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 정부가 국민들과 약속한 대형 투자 사업들도 하루빨리 결실을 맺어서 국민들과 그 성과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춘천~속초 철도 사업처럼 수십 년 간 지역주민들이 애타게 원하는데도 과거의 틀에서는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사업들이 있습니다. 이런 대형사업들이 관광, 스마트 헬스케어와 같은 새로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만들면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입니다”라고 주문했다. 국가 예산을 주무르는 경제부총리와 철도건설 주무 부처인 국토부 장관이 대통령의 이 발언을 주목한 것은 당연하다.

당초 민자사업으로 발표됐던 춘천~속초 간 고속화 철도가 재정사업으로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박 대통령에게 공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자는 이번 철도사업이 국가재정으로 조기에 추진되는 이유의 하나를 우리나라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찾고 싶다. 5일 만에 정부 정책을 민자에서 재정으로 바꿀 수 있는 비정상적인 국가운영 때문이라는 판단이다. 청와대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은 13일 국회에서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지난 6일자 국토부의 민자철도 활성화 방안은 ‘오류’라고 강변했다. 원래 재정사업인데 국토부가 민자사업으로 잘못 발표했다는 주장이다. 국가와 정부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개헌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국가를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경영하자’는 것이다. 동서 고속화 철도 조기 추진을 환영하면서도 국가 경영의 단면을 들여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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