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언에 갑질까지… 한 평 남짓 사무실로 내몰리는 인권
가지치기·제초 등 업무 잡다
주차·층간소음·택배 문제 등
주민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
고강도 2교대 근무 처우 열악
임금 인상에도 해고 우려 앞서
“감정노동자도 인권·감정 존재
국가적 차원 뒷받침 됐으면…”

“감정노동자들에게도 인권이 있습니다.우리는 노동력을 임금과 바꾸는 것이지 인권을 파는 건 아닙니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아파트 단지에는 불을 밝힌 곳이 많지 않다.그러나 매일 새벽 가장 일찍 불이 밝혀지고 밤이 늦어도 완전 소등을 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바로 아파트 경비원의 초소다.봄비가 내린 지난달 26일 밤 9시.춘천의 한 아파트 단지에 있는 김철형(가명·68)씨의 초소도 환하게 밝혀 있었다.김 씨는 자영업에 실패한 후 경비원이 됐다.올해 17년 차다.한 평 남짓한 초소가 그의 유일한 보금자리이다.이 곳은 김 씨에게 사무실이자 점심·저녁끼니를 해결하는 식당이다.야간 순찰 후에는 비좁게나마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김 씨는 오전 7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30분까지 24시간 2교대로 아파트를 지키고 있다.설,추석 등 명절에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김 씨는 본연 업무인 경비활동부터 분리수거,아파트 단지 안팎 청소,택배관리,민원업무 등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폭우가 쏟아지면 단지 내 배수점검은 물론 아파트 내 주민 민원 처리까지 경비원들의 몫이다.화단 정리와 가지치기,제초 작업 등도 김 씨를 비롯한 경비원들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겨울에는 제설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이처럼 경비원의 업무는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닥치고 일하는 것’으로 통한다.아파트 내 가로주차 안내와 정리도 필수업무 가운데 하나다.김 씨가 근무하는 아파트는 지은지 오래돼 지하주차장이 없다.때문에 매일 주차전쟁이 벌어진다.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가로주차를 한 주민들 때문에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 실랑이가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10년 전 비가 내리던 어느 새벽,이 문제로 주민간 실랑이가 벌어졌다.당시 초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김 씨는 초소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그 주민은 다짜고짜 “경비가 도대체 뭘 하고 있냐.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거친 말을쏟아부었다.김 씨는 대응을 해보려고도 생각했지만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는 주민이 깬 유리창의 파편을 치우는 과정에서 파편이 튀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었다고 한다.
이 같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김 씨는 주차문제,층간소음 문제 등 아파트에서 빈번한 주민간 갈등에 시비를 떠나 무조건 중재 역할에나선다.초소에 경비원이 없을 때 택배 물품을 두고 가는 택배기사와의 마찰,물품이 분실됐다며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도 단번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김 씨는 “강도 높은 작업이나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이 아파트는 우리 네식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라고 되뇌인다”고 말했다.그는 “지난 2014년 10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입주민의 괴롭힘으로 우울증을 겪다 주차장에서 분신자살한 50대 경비원의 사건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진다”며 “동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우리 경비원들에게도 인권과 감정이 있다”고 호소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고용 불안 등 열악한 처우도 경비원들을 고달프게 하고 있다.아버지들의 ‘마지막 직장’으로 불리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한다.그러나 근무 강도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24시간 격일제로 일하는 경비원들의 임금은 최저 임금 수준에 맞춰져 있다.월 평균 임금(실수령액 기준)은 141만1070원으로,희망임금(175만1183원)보다 34만원 정도 적다.경비노동자의 경우 ‘감시단속적 업무’로 정부 승인을 받으면 근로시간 및 휴일·휴게 규정을 적용 받지 않아 주 40시간 초과 노동을 해도 연장수당이 없는 탓이다.이는 올해 최저 시급(6470원)을 기준으로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하는 근로자의 한 달 임금 135만2230원과 비슷하다.올해 최저 임금이 인상됐지만 경비원들은 되레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무급 휴게시간 연장과 인력감축 등이 예상돼 오히려 최저 임금 인상이 자신들의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300세대 이하 소규모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들의 근무환경,처우 등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300세대 이상 아파트 경비원들은 인권과 처우개선 등을 보장 받고 있지만 소규모 아파트 경비원들은 법망 관리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다.또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감정노동자들의 보호와 권익 증진,업무환경 개선 등을 골자로 한 ‘감정노동자보호법’제정안이 발의됐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하며 표류하고 있다.
17년 차 경비원 김 씨는 오늘도 소망한다.그는 “전국 경비원들의 공통 요구사안인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 등이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뒷받침 됐으면 좋겠다”며 “감정노동자들에게도 인권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끝> 박지은 pje@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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