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따라가는 춘천 의암호

의암호는 지난 1967년 수력발전을 위해 신동면 의암리와 서면 원당리 사이 수로에 세워진 댐에 물이 채워지며 생겨났다.인공호수이지만 너비 5㎞,길이 8㎞로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는 덩치다.몸집이 크다보니 명소들이 많고,그곳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명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면 또 다른 의암호를 엿볼 수 있다.

▲ 석파령
▲ 석파령
옛 춘천서 서울 가는 유일한 육로

석파령

옛날 춘천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방법은 두가지로 하나는 뱃길이었고,또 하나는 석파령을 넘는 육로였다.석파령은 새로 부임하는 수령과 자리를 옮기는 수령이 인수인계를 하는 곳이었다.이들이 자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잘라 나누어 앉아 석파령(席破嶺)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사직령이라고도 불리었다.춘천으로 부임하는 관리가 석파령에 도착하기 전 수많은 고개를 넘어왔는데 석파령도 넘어야 한다는 말에 사직하고 돌아갔다는 연유에서다.고려 이자현은 혼란스런 현실을 피해 은거지를 찾으며 여기를 넘었고,조선 김시습도 여기를 넘어 청평산에 은거했다.서울로 가는 도로가 놓이면서 잊혀진 석파령은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험한 고개가 유명세를 타 산악자전거와 트레킹 마니아의 발길을 끌고 있다.

▲ 문암
▲ 문암
협곡이 빚어낸 춘천의 대문

문 암

석파령이 춘천의 관문이라면 드름산 밑에 있는 문암은 춘천의 대문이다.1823년 다산 정약용은 강촌에서 시를 한 수 짓고,삼악산을 보며 또 한 수를 지은 뒤 무릎을 쳤다.협곡이 빚어내는 장엄함과 마치 춘천으로 입구를 지키는 대문과 같은 문암을 보고서다.문암은 풍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봉의산에서 바라보면 좌우의 산들이 펼쳐지고 강물은 춘천을 감싸 안고 있다.물이 나가는 곳에 우뚝 솟은 문암은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한다.정약용 뿐만 아니라 시인들은 문암을 놓고 시를 짓고 의미를 부여했다.

▲ 소양1·2교
▲ 소양1·2교
곳곳에 박혀있는 동족상잔의 상흔

소양 1·2교

소양1교에는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있다.한국전쟁의 상흔이다.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표적인 다리인 소양2교는 한국전쟁 속에 건설됐다.1951년 미군이 만든 나무다리가 그 전신이다.군수물자 보급용으로 건설된 다리는 미공병단 소속 프랭크 포니 대령의 이름을 따서 ‘포니 브릿지’로 불렸다.1967년 콘트리트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이름이 소양교로 바뀌었다.소양2교는 그 자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다리를 건너면서 보는 풍경도 한 폭의 수채화이다.안개가 끼거나 노을이 내려앉으면 그 멋이 더 짙어진다.

▲ 오미나루
▲ 오미나루
느티나무 그늘 아래 오고가는 담소

오미나루

서면 신매리 수변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의 파출소에 내려 보낸 느티나무 중 하나다.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많이 찾았는데 곁으로 자전거도로까지 놓여 명소가 되었다.여기가 오미나루다.오미나루는 춘천을 살찌운 교통로로 뱃길을 따라 사람과 곡물 등이 오고가 강 주변은 풍성해졌다.오미나루는 우마차를 싣고 건너다니는 규모가 큰 나루로 나루터가 있는 신매3리는 진두마을로 불리었다.오미나루는 서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던 동행의 공간이기도 했다.

▲ 김유정문인비
▲ 김유정문인비
김유정은 호숫가에서 무슨 생각 했을까

김유정문인비

춘천이 낳은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12세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1929년 고향 신동면 실레마을로 돌아왔다.김유정은 낚시를 하며 시심을 길렀는데 현재 문인비가 자리한 곳에 자주 찾았다고 한다.문인비 옆 김유정행장비는 청풍 김씨 가문의 내력과 함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지난 1968명 문인비 제막식에는 김유정이 짝사랑했던 명창 박녹주가 참여했다고 한다.

▲ 삼악산성
▲ 삼악산성
나라 재건 염원하며 침략에 맞서다

삼악산성

삼악산성에서는 맥국의 전설이 전해진다.적의 침공을 받은 맥국은 삼악산으로 궁궐을 옮겼다.산세가 험하다보니 적들은 공격 의사가 없는 것처럼 위장해 맥국을 안심시켰다.그리고 기습공격으로 북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맥국 군사는 저항을 해볼 겨를도 없이 대패했다.궁예와 얽힌 이야기도 있다.궁예는 산성에서 왕건과 맞서 싸웠고,나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흥국사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당시 궁궐이 있는 곳은 지금도 대궐터로 불린다.내성과 외성으로 이뤄져 총 길이가 5.8㎞에 달하는 삼악산성은 정확한 축조연대를 알 수 없다.맥국시대나 삼국시대라고도 하고 조선 중기에 축조되었다고도 한다.

▲ 장절공 신숭겸 묘역
▲ 장절공 신숭겸 묘역
왕건을 지킨 푸른 소나무같은 충성심

신숭겸 묘역

신숭겸은 태봉의 장수로 있다가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왕건에게 거사를 권했다.927년 후백제가 경주를 공격했고,왕건은 신라를 도왔으나 팔공산 부근에서 병력이 부족해 대패했다.신숭겸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왕건과 자신의 외양이 닮은 점을 이용,갑옷을 바꿔 입고 태조를 탈출시킨 뒤 적진으로 향했다.후백제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해 그의 목을 베었다.태조는 그의 공을 기려 후백제군이 베어간 그의 머리가 도굴을 당할까 염려해 춘천,구월산,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었다.신숭겸 묘역은 우리나라 삼대 명당으로 전해져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장절공에게 충성심을 나타내듯 낙락장송이 묘를 향해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김정호 kimpr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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