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봉인사회’ 이제는 적폐 닦아내고 맨바닥 드러낼 때
언제부터 자긍심이어야 할 민낯이 이렇게 남루해 진 것일까
정직은 현대인에게는 무모한 덕성이 되는 것일까

딱히 요즘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TV 화장품 광고를 보면 가히 왕소군이 고기를 굽고,서시가 서빙을 하고,양귀비가 카운터를 보는 듯 황홀하다.상하좌우 어디에도 시간은 정지하여 영원할 것 같은 젊음과 탱탱만 있고,쇠약과 퇴락은 볼 수 없다.더하여 중력에 맞춤하는 주름은 삼족을 멸하고 척결해야 할 악의 근원이 된다.주름과 비만은 무상식과 무능력의 온상이 된다.말하자면 세상은 승자의 세계이다.모두가 승자가 못된다면 적어도 승자를 숭배하고 지향하는 자들의 세계이다.끊임없이 재생되는 세포처럼 자본주의는 욕망과 승리를 부추긴다.당신도 할 수 있다고,당신이 주인공이라고,그래서 소비하라고,돈이 없지 간지가 없냐고,빳빳하게 날선 플라스틱 카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빌딩사이를 날아다니며 돈 가루를 뿌리며 허름한 주머니를 노린다.

그렇지만 현실은 TV 실황중계가 아니어서 궁민들은 TV에만 있는 허구라는 것을 안다.충분히 알고는 있지만,허기처럼 은연중 스며드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낙수효과는 돈에서가 아니라 이렇게 심리분야에서 먼저 흥건해진다.그래서 멀쩡한 눈에 쌍까풀을 가장하거나 표 나지 않는 짝퉁이거나 아니면 매일 결심만 하는 다이어트쯤의 대리 만족으로 눙친다.그러나 유사 이래 33세 어간쯤의 정점을 지난 어떤 인류도 중력의 법칙을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그래서 사람들은 지나는 시간을 향해 안티에이징의 자세로 주먹을 쥐고 눈을 번뜩인다.그러고 보면 주먹은 단단한 뼈의 외형이 뭉쳐진 공격과 폭력의 기호이고, 손바닥은 부드러운 살집의 포용과 수긍의 자세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요즘에는 손마다 핸드폰이 문신처럼 장착돼 맨 손바닥을 보기 어렵다.

하여 지금은 누구도 자신의 바닥을 보이지 않는다.먼저 손바닥을 내밀며 무장해제의 몸짓을 보이는 것은 선거,투표 전날까지의 의례 외에는 바라지도 않는다.친절과 감정조차 후일 달릴 댓글의 수위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노동이 된다.이것은 나와 타인 간의 관계만이 아니다.어느 새 사람들은 자신의 민낯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자신의 부족과 남루는 그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봉인해 놓고 미세 의심 방어용의 매끈한 마스크를 착용한다.대도시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같아졌는지 시골의 젊은이들도 어서어서 닮아간다.그래서 사방팔방 민낯을 가리는 가면무도회가 열린다.산전,수전,공중전에 IT전,눈치전,백병전에다 바야흐로 육박전이 매일 벌어지지만 어디하나 결판이 나지 않는다.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는 납득과 인정이 있어야 싸움은 일단락되고 포용과 화합, 합의가 있을 터인데 서로 승리를 주장한다.누구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이렇게 되니 싸움은 그 시초도 사연도 모른 체 장기전,진지전에 돌입한다.전투가 생활이 된 사람들은 또 다시 TV나 핸드폰에 머리를 박는 되돌이표,이게 가히 현대인의 일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궁민들은 정부(국가)라는 합의체를 만들어 놓았지만 동서고금,그 정부는 궁민을 위해 제대로 일을 진행할 생각이 별로 없다.그저 궁민들끼리 정규직,비정규직,세대간,지역간 서로에 대한 감독이면서 심판이면서 선수가 되어 편을 가르거나 싸움을 방관한다.한집 건너 치킨집이요,한집 건너 커피점이 일어섰다 엎어졌다 할 뿐 지속가능한 희망을 갖기 어렵다.대부분의 전문직들도 길거리 궁민들을 전염병이 옮을 듯 띠어내기에 바쁘지만,정작 자신들의 행복도 위태로웁다. 이렇게 궁민 대부분을 루저로 만들어 놓았으니 사회는 당연 흥행도 없고 활력도 없는 게임이 되어 현실은 재미없는 지옥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한동안 회자되었던 ‘부자 되세요’의 소박 청유형 덕담수준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차별,무저갱(無底坑)의 뻔뻔한 기름칠과 철갑 분장 파운데이션을 번쩍거리는 도시로 변모한다.

기실 적수공권은 사람들마다의 기본 전제이고 운명이고 결론인데도 좀처럼 맨 바닥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다.그러고 보면 손바닥은 인종과 피부색과 관계없이 가장 유사한 빛깔을 갖고 있다.작고 힘없는 바닥은 늘 아래로 밀려나는가 보다. 이런 점에서 세월이 흐르면 만국의 사람들이 주름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이 주름 속에는 지금까지 살아낸 신산한 땀과 눈물,웃음과 노동이 있고 어쩌면 전생부터의 삶을 살아낸데 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그런데 언제부터 자긍심이어야 할 민낯이 이렇게 남루해 진 것일까.이 점에서 정직은 현대인에게는 무모한 덕성이 되는 것일까.

어느덧 우리의 예술도 이와 같아서 회화는 갈수록 의미모를 붓질로 덧칠된 비구상으로 달려가고 음악도,시도 과도한 제 이야기 속에 갇혀 한참을 롤러코스트 하다가 뒤집힌 채 제자리에 올려다놓기 일쑤이다.하여 관람자는 청취자는 독자는 무슨 퍼즐을 풀 듯 용을 쓰며 작품 앞에 섰다가 하릴없는 표정으로 돌아서기가 열에 아홉이다.어느새 이 자세는 이 자세는 학문이나 정치판에도 허다하여 마을 골목에서 일어난 해프닝에도 난해한 해외 이론을 들이대거나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기는 식의 중언부언 결국에는 빼지도 끼지도 못한 채 이래저래 불어터진 논지로 남겨 놓기가 십상이었다.

요는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칙연산 같은 명확한 사안에 대해서도 우리는 술에 물탄 듯 한 미망에서 헤매고 있으며,이를 또 굳이 깨어나게 할 의지도 없는 21세기를 지나고 있다.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완장을 찬 사람마저 결국에는 마름일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저 혼자 별종으로 주름을 모르는 피부를 가진 듯 우월의식에 빠져있다면 이만한 자가당착도 없는 셈이다. 피부에 양보할 것도 있겠지만, 가끔은 이태리 타올로 이미 커져 살처럼 보이는 갖은 때, 온갖 적폐를 박박 문질러 닦아 내야 한다.그리하여, 마침내 맨살에서 배어 나오는 눈물 한 방울은 그 얼마나 소중한가.그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담대한 여정. 이제 주저도 회한도 없이 우리의 남루와 민낯을 내어놓자.그렇다고 우리 서로에 대한 예절인 세시함에마저 인색하지는 말자.이름 모를 들꽃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집중하는가.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오는 아름다움, 우리는 그것을 기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 최삼경   강원도청 대변인실 근무. 북한강생명포럼 이사   저서로 한국 소설 49편의 강원도 배경지를 여행하며 쓴 산문집 ‘헤이~ 강원도’가 있다
▲ 최삼경
강원도청 대변인실 근무. 북한강생명포럼 이사
저서로 한국 소설 49편의 강원도 배경지를 여행하며 쓴 산문집 ‘헤이~ 강원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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