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현 언론인·상지대 초빙교수
▲ 정운현 언론인·상지대 초빙교수
한동안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라면 유관순 열사밖에 모르고 지냈다.그러나 분명 그렇지 않다.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8월 15일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325명(외국인 4명 포함)이다.그간 국민들이 잘 모르고 지낸 것은 국민 탓만은 아니다.역사학계에서 열심히 밝혀내지 못한 탓이요,보훈처에서 널리 홍보하지 않은 탓이며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 오히려 더 크다.

근자에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연구자도 생겨나고 기념사업회도 꾸려졌다.이는 2015년에 개봉한 ‘암살’이라는 영화가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이 영화는 누적관객수가 12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안옥윤 역은 영화배우 전지현이 맡았는데 그는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 의사를 모델로 했다.총을 든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일반 국민들에게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필자는 여성독립운동가 24인의 삶을 다룬 책을 쓰면서 몇 군데 답사를 했다.그 중 한 곳이 춘천이 낳은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의 유적지였다.춘천시 남면 가정리에는 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남면 여의내골에는 윤 의사가 여성의병들을 모아 훈련했던 터를 비롯해 무기 및 화약 제조소가 남아 있다.또 그 인근에는 윤 의사 생가를 비롯해 윤 의사 등 이 집안 3대의 묘소가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윤 의사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여성의병장 출신이다.186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열여섯 되던 해에 춘천시 남면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혼인하면서 춘천 사람이 됐다.이 집안의 항일투쟁은 의병장 유인석의 재종형인 시아버지 유홍석으로부터 시작됐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홍석은 춘천지역 유림들을 규합하여 소위 을미의병을 일으켜 자신이 의병장을 맡았다.이때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전국에서 ‘정미(丁未)의병’이 일어났다.시아버지 유홍석은 다시 춘천에서 궐기하여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윤희순도 가만있지 않았다.고흥 유씨 집안의 부인들과 인근 동네 여성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냥을 거둬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탄약제조소를 직접 운영하며 의병들에게 탄약을 만들어 공급하였다.또 가정리 여성 30여 명을 규합하여 여성의병대를 조직하였으며 그 자신은 남장을 하고 정보수집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의 가족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였다.유홍석과 아들 유제원은 먼저 떠나고 윤희순은 이듬해 4월 가산을 정리한 후 아들 3형제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그 후 윤희순은 학교를 지어 한인 2세들의 교육을 맡았으며 조선독립단과 가족부대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그러던 중 1935년 6월 장남 돈상이 일경에 체포돼 고문 끝에 사망하자 윤 의사 역시 11일 뒤에 장남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일흔 다섯,만주로 망명한지 24년째 되던 해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거의 없던 그 시절에 윤 의사는 여성의 몸으로 독립투쟁 전선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그러나 윤 의사에 대한 평가나 예우는 고향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그의 동상은 춘천시립도서관 뒤편 주차장에 외로이 서 있다.정부의 독립유공 포상 역시 5등급 가운데 제일 낮은 5등급(애족장)에 그치고 있다.여성독립유공자 가운데 윤 의사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분도 드물다.또 어찌 보면 유관순 열사보다 더 윗자리에 갈만한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다.다 제쳐두고 우선 동상이라도 인근 공지천 의암공원의 유인석 선생 곁으로 모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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