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용만·철원애국단, 국내·외 항일운동 구심점
연중기획┃100년전 그날을 만나다
철원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임시정부 필요성 최초 주장
재미독립운동 선구자 우뚝
도내 만세운동 발원지 철원서
5000여명 참가 최초·최대 규모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 결성
독립운동가 선양 초라한 수준
철원300주년기념사업회 출범
생가터 복원·기념관 건립 추진

▲ 철원군민들이 철원군에서 3·1운동 직후 결성된 철원애국단 단원들의 구국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3월 1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8리 54(철원고 교정)에 건립한 애국선열 추모비.
▲ 철원군민들이 철원군에서 3·1운동 직후 결성된 철원애국단 단원들의 구국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3월 1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8리 54(철원고 교정)에 건립한 애국선열 추모비.

1919년 이전에도 의병활동 등 국내·외 항일운동은 지속돼 왔다.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틀을 잡은 것은 대한인국민회의 역할이 컸다.1911년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도 도내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철원 출신 ‘재미 독립운동의 선구자’ 박용만이다.1911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논설을 통해 해외 한인을 통일,결속하기 위해 무형국가나 가정부로 만들고자 임시정부 조직론인 ‘무형국가론’을 주창했다.‘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1911년3월8일),‘조선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1911년4월5일) 등 다수의 논문을 통해 재미동포사회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이러한 그의 노력은 국민회 조직을 1911~1912년 시베리아에서 만주지방 등 16개 지방회가 건설될 정도로 확산시켰다.또 그의 임시정부조직론에 힘입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유일한 조직체로 성장했다.
 

▲ 철원읍에 남아있는 박용만 장군의 생가터.
▲ 철원읍에 남아있는 박용만 장군의 생가터.

외부에서 임시정부수립의 기틀이 만들어졌다면 내부에서는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이 이어졌다.눈에 띄는 점은 서울을 제외한 6개 도시가 모두 이북지역으로 철도역을 갖췄다는 사실이다.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철도를 통해 빠른 시일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방식은 다음날부터 확산,도시에서 농촌으로 점차 확대되며 3·1운동을 상징하는 시위로 자리를 잡았다.강원도에서도 같은 전개양상을 보이고 있다.강원도의 3·1운동은 3월2일 철원의 최병훈이 현재 북강원도 평강(平康)지역 천도교 대교구로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가져와 철원의 천도교인에게 전해준 것으로 계획이 시작됐다.천도교인들은 곧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돼 주모자 11명 전원이 붙잡히면서 계획은 무산됐다.이후 기독교측에서 청년단원과 각 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월7일로 변경했으나 청년단측에서 서울의 정황을 살핀 뒤 전개하자고 주장,10일로 연기됐다.10일 철원의 만세운동은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농업학교·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지방청년 등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추진됐다.이후 11,18일로 이어진 철원읍 만세운동과 함께 3월12일 갈말면 만세운동,4월8일 내문면 만세운동 등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도내 항일운동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특히 도내 처음으로 5000여명이 참가하는 최대 규모의 3·1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후 철원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이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강원도청의 전신인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도 철원애국단이 모태가 되는 등 1919년 항일운동 역사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대한독립애국단은 1919년 4월,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조직됐다.그해 철원출신 김상덕은 애국단에 가입하고 강원도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정,8월 11일 권인채·김상덕에 의해 철원군단(鐵原郡團)이 결성됐다.임원은 군단장 이봉하,서무과장 강대려,재무과장 김완호,통신과장 박연서,학무과장 박건병,외교부원 이용우·김철회·오세덕 등으로 꾸려졌다.철원애국단의 활동이 도내 각지로 확대돼 나갔으나,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철원의 부호가 이를 경찰에 밀고했고 1920년 초 관계자 전원이 체포됐다.
 

▲ 철원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 철원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철원에는 그 당시 처절하고 고결했던 독립 만세운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철원애국단의 숭고한 조국애를 기리기 위해 1967년 국회와 철원주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애국선열추모비’에는 노산 이은상 시인이 쓴 비문을 통해 당시 단장 이봉하 선생을 비롯한 강대려·김완호·박연서·박건병 선생 등 당시 단원들의 활약상과 애국정신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다만 3·1운동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강원도 만세운동의 발원지 철원의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은 상태다.

철원독립기념운동사업회는 2013년 정식으로 발족됐고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기념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철원기독교연합회의 주축으로 ‘철원 300주년 기념사업회’가 지난 4일 출범식을 가졌다.현재 철원 지역사회에서는 박용만 생가터를 복원하고 도내에 없는 독립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특히 박용만 생가터는 최근 군부대 소유에서 부대 이전으로 인해 공유지로 남아 철원군에서 활용 공모사업을 진행중이다.철원 사회단체에서는 도내 독립기념관이 없다는 점,철원이 대한민국의 항일운동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왔다는 점 등을 토대로 건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철원 30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역사학교인 봉명학교를 운영하고 3·1운동의 격전지였던 거리에서 재현행사를 하는 등 선양사업을 지속가능하도록 확대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석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