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소련 강대국 이해관계에 한국전쟁 발발
우리 정부·한국사 교과서
‘6·25전쟁’ 공식적 사용
국제적으로 ‘한국전쟁’

▲ 사상 처음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시민들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1945.9.9)
▲ 사상 처음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시민들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1945.9.9)
# 한국전쟁 명칭

‘한국전쟁(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멈춘 전쟁이다.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공산·반공 양 진영이 대립 충돌한 국제전이었다.그리하여 이 전쟁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대한민국에서는 초기부터 ‘6·25사변’ 또는 ‘6·25동란’으로 불리다가 최근에는 외국 문헌에서 ‘Korean War’를 직역한 ‘한국전쟁’으로도 불리고 있다.하지만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또는 ‘조선전쟁’으로 부르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또는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인민군을 도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도 부르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전쟁은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별칭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아직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휴전 중이기에 ‘끝나지 않은 전쟁(The Unended War)’이라고도 불리고 있다.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면이 있기에 이와 함께 ‘한국전쟁’을 널리 쓰고 있다.

▲ 김일성(우측)과 박헌영(두 번째 안경 쓴 이)이 스탈린을 만나고자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최고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1949.3)  출처 NARA
▲ 김일성(우측)과 박헌영(두 번째 안경 쓴 이)이 스탈린을 만나고자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최고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1949.3) 출처 NARA


#한국전쟁 발발 원인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다.개인 간의 싸움에도 그 원인이 있는데 하물며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 그 원인이 없겠는가.그 원인에도 연관성이 먼 간접적인 원인과 가까운 직접적인 근인(近因)이 있다.

우선 한국전쟁의 원인을 보면 근세 조선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조선왕조는 나라 밖 국제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지냈다.그러면서 봉건주의와 유교사상을 신주처럼 받든 채 변화와 개혁을 줄곧 거부해 왔다.군왕을 비롯한 지도층 사대부들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힘없는 백성 수탈에만 전념했다.그러다가 1910년 우리나라보다 일찍이 서구 문물에 눈떠 이를 미친 듯이 도입하여 단시일 내 부국강병을 이룬 이웃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 한국전 참전 유엔군 병력을 태운 배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브라스밴드를 앞세운 주한 유엔군들이 참전국 국기를 들고 환영식을 하고 있다.(1950.9.20)
▲ 한국전 참전 유엔군 병력을 태운 배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브라스밴드를 앞세운 주한 유엔군들이 참전국 국기를 들고 환영식을 하고 있다.(1950.9.20)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도 그들의 야욕은 그칠 줄 몰라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1937년에는 상하이사변를 의도적으로 일으켜 중국대륙을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그러자 미국 ·영국 등이 이를 견제하자 마침내 일본은 이들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침을 흘려오던 소련조차도 연합국 편으로 침공해 온데다가 전대미문의 원자탄 두 방을 맞은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그러자 애써 참전 준비를 해온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은 대일전에 참천치도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그 결과 우리나라는 한낱 연합국의 전리품으로 미소 양국은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가진 게 한국전쟁 발발의 근본 불씨였다.

다음으로 한국전쟁의 근인(近因)은 해방직후 한반도의 정세를 들 수 있다.당시 미군과 소련군은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다.그러면서 이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꿍꿍이 속이었다.한반도에 한국인을 위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운다는 생각보다 서로 자기네 입맛에 맞는 친미,친소정부를 세우려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한반도 통일정부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 열렸지만 그것은 명분 쌓기에 불과했다.마침내 1948년 8월 15일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을 수립하자 곧 그해 9월 9일 38선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이로써 두 정부 간 격렬한 대립과 동족상쟁은 출발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 6·25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4월 4일 춘천 근교 소양강변에서 손자를 업은 한 할아버지가 유엔군 탱크를 지켜보고 있다.  출처 NARA
▲ 6·25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4월 4일 춘천 근교 소양강변에서 손자를 업은 한 할아버지가 유엔군 탱크를 지켜보고 있다. 출처 NARA

한반도 남과 북에 두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소련은 먼저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이듬해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더 한층 전쟁준비에 힘을 쏟았다.그런 가운데 19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은 미국이 반드시 방어해야 할 방어선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른바 ‘애치선 라인’을 발표했다.이는 북한 및 소련 에게 남침을 위한 청신호로 오판케 했다.소련의 지속적인 무기 원조를 받으며 착실히 군비를 증강하던 북한의 김일성 군사위원장은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오가며 조율한 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이는 미국이 한반도 재상륙을 위해 던진 ‘애치슨라인’이라는 미끼를 공산진영이 ‘이게 웬 떡이냐’고 덥석 문 것은 아닌지? 아무튼 한국전쟁은 미소 강대국의 땅 따먹기 놀음에 우리 백성들은 고래싸움에 등터진 꼴이었다.


저자 박도(朴鍍)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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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1945년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교단에 섰다.현재 원주 치악산 밑에서 글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작품집은 장편소설 ‘약속’ ‘허형식 장군’ ‘용서’ 등이 있고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등을 펴냈다.이 밖에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일제강점기’ ‘미군정 3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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