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100년전 그날을 만나다
장날 중심 자연스런 군중 밀집
교인→이웃 독립선언서 전달
천도교·기독교·천주교 등
탄압·희생 속 수천명씩 참가

[3·1운동,임정수립 100년]<4> 종교와 민중이 이끈 영서지역 만세운동

철원에서부터 시작된 강원도 영서지역 만세운동은 종교인들의 주도로 계획됐다.당시 자연스럽게 군중들이 모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장날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1919년 3월 회일 천도교 화천교구에 독립선언서 90매가 전달,교인들을 통해 이웃에게 배포됐다.화천 신읍리는 3월23일,장날 시위를 하기로 했으나 내부 밀고로 주도자들이 일제에 검거되며 실패했다.

하지만 계획이 탄로 난 것을 알지 못한 여러 마을에서 시위를 그대로 추진했다.3월28일 상서면에서 다시 점화된 만세운동은 학자,청년,농민,의병출신,산림기수,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고 인근 마을주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상서면사무소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우여곡절 속에서도 2000여 명에 이른 시위 군중은 신풍리 앞 주막거리까지 진출했으나 출동한 일제 헌병의 발포에 의해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당시 기록상에는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했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으로 22명이 징역형을 받았다.또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이들 피검된 인원은 강원도내 최대 규모였다.

춘천은 도청을 비롯한 관공서가 밀집된데다 당시 헌병사 사령부가 위치해 감시가 삼엄한 지역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3·1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못했다.다만,천도교인인 윤도순·이준용·박순교 등은 3월 중순부터 만세시위를 이끌어나갔다.이들은 3월28일 춘천 장날에 맞춰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태극기를 숨겨 춘천 요선동 장터로 들어가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헌병과 수비대의 삼엄한 경비로 참여자는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춘천시민들의 애국심을 이끌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 화천만세항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화천 3·1만세운동기념공원.
▲ 화천만세항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화천 3·1만세운동기념공원.
▲ 홍천군 내촌면 동창리 기미만세공원에 조성된 8열사 동상.
▲ 홍천군 내촌면 동창리 기미만세공원에 조성된 8열사 동상.
▲ 영월 금마리 3·1독립운동 참여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금마리 독립만세상.
▲ 영월 금마리 3·1독립운동 참여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금마리 독립만세상.
정재술(춘천 정인회 의병장 손녀)씨는 “당시 할아버지(정인회 의병장)도 독립운동 후 일제의 모진 고문끝에 돌아가셨다.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하나로 독립운동에 나섰다”고 말했다.

3월 27일 횡성에서는 천도교인의 주도로 전개된 만세시위가 펼쳐졌다.장날에 열린 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흐지부지 끝났지만 다음 장날인 4월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됐다.두번째 시위에서는 천도교 외에도 횡성청년회와 횡성감리교회도 함께 참여,1300여 명의 대규모 군중으로 커졌다.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군청 건물 등을 부수며 무력시위를 벌였고 시위 주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했다.

홍천장터 만세시위는 기독교와 천도교인이 공동으로 추진했다.4월 1일 홍천장터에 몰려든 홍천면과 북방면의 주민 2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시작으로 홍천전역에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5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홍천군청,홍천면사무소로 이동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뒤늦게 춘천에서 출동한 일제 수비대에 의해 현장에서 33명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혔다.이튿날인 4월2일 동면에서 80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4월3일에는 동창장터에서 5개 면민(내촌면,화촌면,서석면,내면,인제군 기린면) 3000여명의 군중이 운집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도준이 징을 치면서 내촌면 주재소를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현장에서 이순극·전영균·이기선·이여선·연의진·김자희·전기홍·양도준 등 8명이 순국했고 함춘선·승만수 등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양구에서는 4월 3일 양구면 용호리의 정승원,함춘리의 최우명·김병하 등 수십 명의 천곳교인들이 양구군청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당시 천도교인에 한정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모진 탄압속에서도 만세운동의 열기를 사그러들지 않았다.

영서남부지역에서는 민중 중심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원주 노림리에서는 3월 27일 노림의숙 제1회 졸업생 7명이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청년들이 군수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곳으로 유명하다.4월 5일에는 소초면민 300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4월 7,8일에는 귀래리에서 주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에 나섰다.흥업리에서는 4월 9일 낮과 밤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펼쳐졌고 주민 대부분은 일제 관헌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4월 11일 손곡리에서는 주민 수십여 명이 총 9회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19일 매호리에서는 1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밤새 횃불을 들고 새벽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성낙윤 3.1운동 100주년 원주시민행사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은 “원주지역은 의병,종교인 출신이 아닌 각 마을별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서며 읍면동별로 기념비를 세우고 만세운동을 기리는 등 주민주도형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영월에서는 4월 7일 당시 화전민이 거주하던 황계리에서 주민 13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이 펼쳐졌다.이후 4월21일 금마리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 군수가 오는 날을 잡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당시 주천 장날이기도 해 수많은 군중이 모였고 시위자들은 군수 일행을 막고 군수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해치우겠다고 위협했다.군수는 억지로 만세연명부에 서명하며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으나 뒤늦게 출동한 헌병에 의해 주도자들이 체포돼 더 확산되지는 못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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